공작신동
서울 미동초등학교와 휘문중학교는 대한민국 항공사 史에 빛나는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우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다. 안창남은 1914년 경성미동공립보통학교 지금의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 지금의 휘문중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 오쿠리 小栗비행학교에서 유학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안창남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또 한 명의 항공인이 바로 한진그룹을 창업한 조중훈이다. 조중훈 역시 미동보통학교를 나와 휘문고보를 다니다 중퇴하고 해원양성소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훗날 대한항공이라는 세계의 날개를 활짝 폈다.
조중훈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2월 11일 음력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아버지 조명희 선생과 어머니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토박이로 살아온 조중훈의 집안은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형편이 넉넉했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과학과 수학 성적이 뛰어났다. 공작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다. 여덟 살이던 어느 날, 조중훈은 집에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라댔다. 재봉틀을 뜯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귀한 재봉틀이 못쓰게 될까봐 보채는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하루 종일 졸라댔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허락했고,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드라이버를 움켜쥐더니 부속품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해체된 부속품들이 마룻바닥에 놓여졌다. 어머니가 재봉틀을 버리게 되었다며 체념하고 다시는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야단치려는 순간, 아이는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기름 묻은 손으로 훔치더니 부품을 하나씩 집어 들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는 가족들을 불렀고, 아이는 신통하게도 분해한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내 역순으로 조립했다.
기계라고 생긴 것은 일단 뜯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은 놀라운 재능으로 발전했다. 해방 이후 한진상사를 창업한 직후에도 기계에 얽힌 일화가 있다. 당시 조중훈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집이 있는 서울과 회사가 있는 인천을 오갔는데, 한번은 금강산에 다녀오는 길에 엔진이 고장 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시골마을에서 오토바이를 수리할 곳은 없었다. 하지만 조중훈은 기어이 고쳐서 타고 돌아가겠다며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 어느 집 처마에 걸려 있는 질긴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꼬고 엮어 엔진 실린더가 새는 것을 막았더니 신기하게도 시동이 걸렸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중훈의 기계를 다루고 고치는 천재성은 훗날 수송사업을 할 때도 빛을 발했다. 트럭 엔진 소리만 들어도 몇 번 실린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맞힐 정도였다. 정비사가 혹시나 하고 뜯어보면 틀림이 없었다. 기계에
대한 관심과 재능은 정비가 생명인 수송업에서 만전을 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조중훈의 재능은 아버지에게는 칭찬거리가 되지 못했다. 조용히 학문에 열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큰아들과 달리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기술자보다 공부로 출세하기를 바랐다. 뚝딱뚝딱 뜯고 고치며 집 안 곳곳을 어질러놓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아버지는 ‘지나치게 동 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 靜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 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어린 정석은 정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동적이었다. 꿈과 모험심은 끊임없이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댔다.
일본 조선소의 책벌레
공작과 기계에 호기심과 재능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조중훈이 계속 학업에 매진하길 원했다. 그러나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간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법이다. 송곳은 감당하기 어린 나이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부족할 것 없던 집안은 조중훈이 휘문고보를 다니던 1930년대 중반,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종로에 큰 포목점을 차렸다. 종로 일대 포목상들의 수입이 괜찮다는 친구의 말만 듣고 무작정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선비집안에서 자라 사업 경험이 전무한 아버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얼마 못 가 대규모 자본과 조직적인 판매망으로 공세를 펴는 일본 도매상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대공황까지 불어 닥쳐 사업은 최악으로 내몰렸다. 물건을 대준 생산자들은 대금 독촉을 해오는데 물건을 가져간 소매점들은 돈 줄 생각을 하지 않아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주문도 들어오지 않아 재고만 쌓여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창고에 불까지 났다. 거래처로부터 받아둔 어음마저 모조리 부도가 나 포목점은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풍족하던 조중훈의 집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당시 조중훈은 휘문고보 3학년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린 조중훈의 마음도 아팠다. 조중훈은 그때 준비 없이 모르는 사업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통감했다. 그런 깨달음은 사업철학이 되었다.
‘모르는 사업은 절대로 손대지 말라.’
훗날 조중훈은 이런 철칙으로 무리한 사업확장을 경계했다. 한국경제가 성장가도를 달리던 1970년대 기업마다 물불 안 가리고 사업을 확장할 때 한진 임원들도 “땅을 사고 공장을 지어 제조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했지만, 조중훈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서 남들이 한다고 따라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며 ‘수송외길’을 고집했다.
조중훈은 이런 사업철학을 유명한 ‘낚싯대론’으로 정립했다.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운다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포인트를 잡아 하나의 낚싯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낚싯대론은 1998년 외환위기 때 우리 기업들을 각성시킨 ‘선택과 집중’과 일맥상통한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위협요인을 최소화하는 위기관리 전략을 일찍이 터득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낚싯대론은 오늘날 한진이 세계적인 수송그룹으로 우뚝 서게 한 안전장치가 되었다.
조중훈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의 경영자였다.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문어발식 확장을 경계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수송에 전부를 걸고 파고들었다. 훗날 여러 계열사를 설립하지만 모두 수송에 필수불가결한 업종을 수직계열화한 것이다. 많은 기업이 가지를 무성하게 뻗어가는 동안 조중훈은 줄기를 곧게 세우며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조중훈의 집념과 장인정신은 변화무쌍한 세계경제의 혼란에서도 길을 잃지 않은 비결이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조중훈은 고민에 빠졌다.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에 여섯이나 되는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어야 했다. 고심 끝에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서 선택한 곳이 진해에 있는 ‘해원 海員양성소’였다. 오늘날 해양대의 모태인 해원양성소는 학교라기보다는 선원이나 선박정비사를 키우는 기술학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생계를 돌봐야 하는 어린 조중훈에게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는 데다 한 달에 8원이 넘는 봉급까지 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보통학교 교사 월급이 15원 하던 시절이었다.
주머니를 비집고 나온 송곳은 더 넓은 세상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송곳의 오디세이가 시작된 것이다.
해원양성소에서의 생활은 배가 뭔지, 항해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혹독했지만 조중훈은 힘든 줄도 모르고 신이 나 있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술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조중훈은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일본 고베에 있는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할 수습생으로 발탁되어 열일곱 나이에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 일본은 조선과 항해 기술에서 이미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조중훈은 해원양성소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현대식 선박과 항해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본에서도 손재주를 인정받은 조중훈은 고베뿐 아니라 오사카와 히로시마 등지의 공업지대로 스카우트되며 경험을 쌓았다.
조중훈은 주어진 것보다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에는 작업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하숙방에 돌아와 독서에 몰두했다. 매일 동네 서점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날 빌린 책은 밤을 새워서라도 읽어야 했다. 조선소에서 한 달 일하고 받는 돈이 20원인데, 책 한 권 빌리는 값이 2~3전이었다. 월급에서 여섯이나 되는 동생 학비에 보탤 돈을 부치고 나면 책 반납을 하루만 어겨도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기계에 대한 호기심은 작업현장에서 열정으로 타올랐다. 쇠를 단련하는 것은 뜨거운 불만으로는 안 된다. 차가운 물도 필요하다. 왕성한 독서는 조중훈에게 냉철한 판단력과 인문적 통찰을 단련하는 담금질이었다. 열정과 냉정을 넘나들며 무쇠처럼 탄탄해진 지혜와 통찰은 훗날 조중훈이 개척하는 길의 견고한 지반 地盤이 되었다.
조중훈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밤을 새워 책을 읽다가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빌려다 본 고서 古書가 화근이었다. 낡은 책장에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결핵균이 옮은 것이다. 학업을 중단하고 어린 나이에 낯선 일본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 병까지 얻어 피골이 상접해 돌아온 아들을 본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졌다. 폐결핵은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고기를 먹일 형편이 못 되었던 어머니는 이웃에게 돈을 빌려 쌀을 조금 사 근처 설렁탕집으로 갔다. 주인에게 가마솥 바닥에 남은 고깃국물에 넣어 끓여달라고 부탁해 그것을 가져다 아픈 아들에게 먹였다. 그 정성으로 몸을 추스른 조중훈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대인과 개성상인을 배우다
1940년 조중훈은 마침내 조선소 수습을 마치고 일본 운수성으로부터 2등기관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우선사 소속 외항선에 올라 중국 톈진과 상하이, 홍콩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로 항해했다. 이 항해를 통해 조중훈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조선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했다.
조선의 바다보다 일본의 바다가 넓었고, 일본의 바다보다 중국의 바다가 훨씬 넓었다. 조중훈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자연의 바다가 아니라 문물의 바다였다. 그의 꿈은 망망대해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지금은 일본 배를 타고 왔지만 언젠간 나의 배, 조선의 배를 타고 오리라..
그가 훗날 한진해운, 한진중공업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비게 된 것은 그때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하이에서 아홉 달 넘게 머물면서 조중훈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전시 戰時의 상하이는 세계 문물과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다. 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연료 대신 지폐를 때고, 생필품과 군수물자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아침 저녁으로 다를 정도였다.
가장 먼저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유대인 상인들이었다. 옷가방 하나 달랑 들고 상하이항에 내린 유대인들은 돈을 벌어 몇 달 만에 번듯한 상점을 차렸다. 어느 겨울날 조중훈은 몸을 녹이기 위해 유대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마실 것을 주문하자 웨이터가 차 한 잔과 함께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조중훈은 웨이터를 불러 “케이크는 주문하지 않았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웨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그냥 놓아두는 것”이라며 “먹은 만큼만 계산한다”고 했다. 점원의 얘기를 듣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마다 케이크 접시가 놓여 있었다. 차만 파는 줄 알고 들어온 카페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들은 자신도 모르게 앞에 놓인 케이크에 손이 가고 있었다.
견물생심 見物生心. 유대인 주인은 바로 그런 심리를 이용해 차보다 비싼 케이크를 팔고 있었다. 이 매력적인 장면은 조중훈이 장사에 관심을 갖게 하고 사업의 꿈을 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장사는 결국 손님의 심리를 꿰뚫어야 하는 게 아닌가. 케이크가 눈에 보이면 케이크에 손이 간다. 그것은 단순히 케이크를 하나 더 팔고 못 파는 문제가 아니다. 수요를 창출하는 고도의 비즈니스 전략이다. 물론 수요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상식을 뛰어넘어야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는 것은 케이크를 원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눈앞에 케이크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밑져야 본전이다.
훗날 조중훈의 사업에서도 이런 수요창출의 혜안이 돋보였다. 항공업에 뛰어들 때도 비행기를 탈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공사 인수는 시기상조라는 상식에 충실했다면 지금의 대한항공은 없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은 비행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중훈이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실덩어리 항공공사를 인수해 일찌감치 항공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상품을 먼저 제시해 수요를 창출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조중훈이 신규노선을 개척할 때 당장의 수요만 판단했다면 대한항공은 지금처럼 세계의 하늘길을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산악인 조지 맬러리의 명언처럼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케이크를 먹는 이유도 케이크가 거기 있기 때문이며, 비행기를 타는 이유도 비행기가 그곳으로 날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유대인 상인이 조중훈에게 수요창출의 지혜를 알려주었다면 철저한 관리의 기술을 가르쳐준 것은 개성상인이었다. 해방 전 조중훈은 철도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승차권을 얻어 평안도, 함경도를 넘어 중국까지 돌아다녔다. 유람이 아니라 견문을 넓히기 위한 답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개성 근처의 ‘야다리’라는 개울가에서 거름으로 쓸 인분을 사들이는 상인들을 보게 되었다. 상인들은 인분통을 휘휘 저은 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 있었다. 조중훈이 놀라며 “더럽게 뭘 하는 것이냐?”고 묻자 상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오줌에 물을 섞지 않았는지 검사하고 있다”고 했다. 개성상인들의 지독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조중훈은 개성상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겨울에 장사를 떠나기 전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비상을 조금씩 먹는 것과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고 눈길을 걸을 때 버선 속 발가락 사이마다 말린 고추를 끼워 넣는 것도 배웠다. 대청마루에 광을 낼 때 겉만 번지르르하게 칠하는 게 아니라 콩기름을 나무 깊이 배어들도록 여러 번 바르고 사기그릇으로 문질러 반들반들하게 하는 것도 보았다.
개성상인들에게서 사업은 한 치의 허점도 없어야 함을 터득한 조중훈은 훗날 수송사업에 뛰어들어 ‘관리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육상이든 해상이든 항공이든 수송의 생명은 운송수단의 품질에 달렸다. 항공기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나사 하나가 승객의 안전은 물론 항공사의 사활을 결정짓는다. 조중훈이 새벽부터 밤까지 정비에 만전을 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인분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맛을 보는 정신으로 철저하게 품질을 관리한 것이 오늘날 한진을 지속 성장하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경계한 것도 개성상인들을 만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개성상인들은 한 가지 업종을 선택해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은 빌려주어도 길은 알려주지 않는 것’이 상단의 오랜 전통이다. 길을 알려준다고 해도 같은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유대인 상인의 케이크 접시는 ‘상술’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인분을 찍어 맛을 보는 개성상인들 역시 ‘의심 많은 장사치’로 비춰질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 무엇을 배우고 깨닫느냐는 자신의 안목에 달렸다. 조중훈은 ‘고객의 마음을 읽는 법’과 ‘철저한 품질관리 철학’을 추출해 체화했다. 상인들은 ‘장사의 방법’을 알려주었을지 몰라도 조중훈은 그 안에 숨어있는 상도 商道를 찾아내 배운 것이다.
빼앗긴 이연공업사
세계문물을 접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조중훈은 1942년 여름,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해원양성소를 나와 열일곱 나이에 현해탄을 건넌 지 5년 만이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썼다 고쳤다를 반복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갑판에 서서 온 몸으로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조중훈의 손에는 객지에서 한 푼 두 푼 모은 밑천이 꼭 쥐어져 있었다.
조중훈은 공장 설립을 서둘렀다. 그가 구상한 사업은 엔진 재생을 전문으로 하는 자동차수리업이었다. 당시 자동차는 목탄을 연료로 썼는데 연소할 때 나오는 카본 때문에 엔진 수명이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늘어나는 자동차에 비해 수리공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기계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던 조중훈은 엔진재생업이 전망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보링기계 한 대를 장만해 종로 효제동에 작업장을 차렸다. 회사 이름은 ‘이연 理硏공업사’라고 지었다. 조중훈이 사장과 기술자를 겸해 밤낮없이 일한 덕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찾는 고객이 늘어 그해 겨울에는 보링기계를 한 대 더 들여놓고 직원도 열 명이 넘게 되었다. 보링뿐 아니라 아연주물까지 시작했다.
예술은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모티브는 씨앗이며 그 씨앗은 예술가의 창작열을 통해 발아하고 거목으로 성장한다. ‘사업예술가’ 조중훈의 모티브는 엔진이었다. 엔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훗날 비행기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고 항공기 제작 사업까지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순탄하게 사업을 키워가던 조중훈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3년 8월 조선총독부는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시키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자동차 정비공장으로 번듯한 모습을 갖춰가던 이연공업사는 설비를 ‘조선화물마루니’라는 군수업체에 넘기고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중훈에게 징용 영장까지 날아들었다.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 채 무모한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조중훈은 용산에 있는 철도공작창에 기술직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징용을 피했다.
당분간 사업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조중훈은 그 사이 집안어른들의 중매로 규수 김정일 金貞一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조중훈이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든 것은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장남인 형은 생업전선에 뛰어들 형편이 못 되었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조중훈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객지에 나가 기술을 익히고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기에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다. 아내 역시 맏며느리 역할을 하며 살림을 도맡아 시어른들을 봉양하고 어린 시누이, 시동생 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피고 뒷바라지했다.
한민족의 전진
1945년 여름, 일제에 회사를 빼앗기고 강제징용을 피해 공장에 들어갔다가 나온 조중훈은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당시 인천 항동 집 근처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가 있었다. 조중훈은 그곳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 회사가 취급하던 품목은 카바이드였다. 카바이드 탄화칼슘는 주로 가스용접에 사용되는 재료다.
8월 15일, 일왕 日王의 항복선언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오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방이 되자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 사장은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을 배운 조중훈에게 회사를 넘겨주었다. 조중훈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약간의 보상금과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트럭을 한 대 장만해 1945년 11월 1일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 韓進’이라는 뜻을 담은 스물다섯 청년 조중훈의 사업보국 의지가 빛나는 이름이었다.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인천항에는 상하이에서 건너온 온갖 물자가 밀려들었다. 조중훈이 인천을 사업의 근거지로 정한 것은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소년 시절부터 항해하며 둘러본 광활한 중국 대륙에는 무한한 기회가 있었다.
대對중국 무역기지로 인천은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입지경제학 측면에서도 탁월한 판단이었다. 인천은 현재 운송업에서 최상의 산업 클러스터를 제공하고 있다.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요소조건과 수요조건, 연관산업까지 분석해 입지전략을 세워야 한다. 오늘날 마이클 포터의 ‘경쟁우위모델이론’도 그런 것이다. 조중훈은 그보다 훨씬 전에 그것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한진상사를 설립한 조중훈은 무역업 등록을 위해 미 美군정청을 찾았다. 군정청이 원/달러 환율을 50대 1로 정하고 무역거래 자유화를 선언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무역업 등록은 쉽지 않았다. 혼란을 막기 위해 일제강점기 법령들의 효력을 당분간 인정했기 때문에 무역업 허가에 많은 규제가 있었다. 자격 요건을 구비한다 해도 ‘배경’이 없으면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인천항 선창가를 거닐면서 조중훈은 고심했다. 인천항을 오락가락하는 화물선을 보며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을 붙잡았다. 바로 운송업이었다.
인천항을 드나드는 화물선에서 하역한 물자들이 소비자의 손에 전달되기 위해서는 운송이 필요했다. 일제의 통제경제가 해방 후 자유경제로 전환되면서 많은 화물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운송수단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해방 당시 남북한을 합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8,000대도 안 되었다.
조중훈은 헐값으로 배와 트럭을 사들여 직접 수리하면서 장비를 늘려나갔다. 당시 국내에는 산업기반이 없었다. 생고무와 식용유를 비롯해 거의 모든 생필품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 각지에서 들어왔고 심지어 라이터돌까지 수입했다. 한진상사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실어 나르며 착실하게 성장했다. 2년이 지나자 보유 화물차가 15대로 늘어났고 수송업 면허도 정식으로 받았다. 이연공업사를 운영한 경험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자동차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조중훈은 중고차를 구입할 때 엔진 상태와 부품을 일일이 확인하고 고장 난 자동차는 신속하게 교체해 운송 기일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조중훈은 운송의 보조사업으로 카바이드와 인견사 장사도 병행했다.
차량과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해방 전 일본인 무역상에게 배운 카바이드 유통을 수송업에 접목했는데, 수송에서 번 돈으로 여름에 강원도 삼척에서 생산되는 카바이드를 사들였다.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이어서 카바이드는 수력발전소가 완전 가동되는 장마철에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때가 가격이 가장 저렴했다. 삼척에서 사들인 카바이드를 트럭으로 인천까지 운반해 겨울에 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다시 인견사를 사들여 봄철에 팔았다. 이를 통해 자금을 쉼 없이 회전시키고 현금 대신 물자를 보유하면서 인플레이션에 대비할 수 있었다. 계절에 따른 수요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재고를 관리해 추가로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을 사업 초기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당시에는 수익금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상하이에 체류하던 시절, 아침과 저녁 맥주 값이 달라지고 지폐뭉치가 땔감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던 조중훈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해 자금회전에 공을 들였다.
조중훈은 자금관리와 함께 신용을 중시했다. 한번은 직원이 빌린 자금을 상환하는 업무를 게을리 해 기일을 하루 넘기고 말았다. 조중훈은 훗날의 경계로 삼고자 퇴직금을 주고 직원을 해고한 뒤 곧바로 채권자들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했다. 조중훈은 훗날 항공공사와 대한선주, 조선공사 등 부실 공기업을 인수하면서 인위적인 감원을 실시하지 않았다. 급여를 미룬 적도 없었다. 이것은 사업가로서 그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당시 직원을 해고한 것은 얼마나 신용을 중시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刻削之道 鼻莫如大 目莫如小 각삭지도 비막여대 목막여소」
조중훈이 금과옥조로 삼은 한비자 韓非子의 명언이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할 때는 코는 크게, 눈은 작게 새겨 놓고 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코를 작게 해놓으면 다시 크게 만들 수 없고, 눈을 크게 해놓으면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중훈은 신용을 얻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얻지 못한 신용을 나중에 얻기는 힘들다. 한진상사의 초기 사업이 순항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용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조중훈은 고객관리에서 신용을 철저히 유지하고 경조사에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운수업은 차량을 고장 없이 유지하고 관리해 적시적소에 운송하는 것이 생명이다. 당시는 수송차량이 중고밖에 없었는데, 조중훈은 엔진 상태가 좋은 차량 중에서도 보유하고 있는 차량과 같은 엔진을 장착한 차만 골라 구입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체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쟁사에 비해 정비와 수리가 빠르게 진행됐다. 한진상사는 창업 5년 만에 트럭 30대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작지만 탄탄한 회사로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다시 시련이 닥쳤다. 6.25가 터진 것이다.
신용으로 재기하다
운수업과 무역업을 통해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한진상사는 전쟁이 일어나자 문을 닫아야 했다. 피땀으로 늘려놓은 차량과 장비는 군용으로 징발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머지 장비도 인민군이 밀려오면 온전하게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조중훈은 그것을 무조건 움켜쥐고 있는 것은 허망한 욕심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조중훈은 예금을 몽땅 찾아 동고동락했던 40여 명의 직원에게 나누어주고 후일을 기약했다. 창고 문을 열어 장비도 모두 가져가도록 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하느라 정작 조중훈은 피난 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가족을 데리고 인천에서 가까운 주안의 먼 친척 집으로 가 숨어 지냈다. 태평양전쟁에 이어 6.25가 사업을 또다시 원점으로 돌려놓고 만 것이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조중훈은 주안에서 나와 인천으로 서둘러 올라왔다. 그러나 한진상사 건물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안 되어 미군 폭격기가 인민군의 남하를 제압하기 위해 인천 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했는데, 그 와중에 회사 건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것이다. 조중훈은 잔해 속에서 뭐라도 건질 것이 없나 살펴보면서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4후퇴로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이번엔 가족을 트럭에 태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조중훈이 인천으로 돌아온 것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간 1953년 봄이었다. 봄은 왔지만 봄이 아니었다. 부산 피난생활을 끝내고 다시 찾은 삶과 꿈의 터전은 다시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조중훈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징발된 차량은 돌려받을 수 없었고 재기를 위해 씻나락처럼 숨겨둔 정비기구마저 온데간데없었다. 피난 때 이용했던 트럭도 부산에서 처분한 터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쑥대밭이 된 부지와 은행 빚뿐이었다.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조중훈은 재기를 서둘렀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폐허 위에 천막으로 세운 가건물에 다시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고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 트럭을 몇 대 장만했다. 전쟁 전 쌓아놓은 신용이 유일한 담보였다. 옛 단골들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된 항동사옥 건너편 해안동에 땅을 구입해 사무실을 연 조중훈은 전후복구 물자 하역으로 꿈틀대는 인천 땅에서 다시 일어섰다. 2년쯤 지났을 때는 6.25 직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한진상사는 다시 트럭 30대를 보유한 중견회사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당시 인천항 부근에는 한진상사와 비슷한 규모의 운송업체가 50곳이 넘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지고 이기는 지혜
조중훈에게 사업은 감각이자 타이밍이었다. 전후복구 물자 하역으로 흥청대는 인천항에 기회가 있다는 육감이 왔다. 홍콩, 상하이, 마카오에서 오는 상선이 모두 인천항에 닻을 내렸고, 인천과 서울 간 물동량이 넘쳐났다. 조중훈은 남들보다 한 발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중훈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있었다. 불안한 전후 상황에서 돈을 벌려면 달러를 벌어야 했다. 그는 미군이 인천항으로 반입해 수십만 평 규모의 부평 보급창을 거쳐 의정부, 동두천 등지의 부대로 운반하는 군수품에 주목했다. 군인들이 수송하는 군수물자를 겨우 트럭 몇 대 보유한 한국 수송업체가 맡겠다니! 누구라도 언감생심이라며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당시 미군들은 한국 업체의 수송 능력은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산업기반도 일자리도 없었던 그 시절, 민심은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살기 힘들어 저지른 생계형 범죄가 동정을 사기도 했다. 구걸로 연명하던 사람들에게 미군 트럭은 식량창고나 마찬가지였다. 군수물자가 인천에 하역되면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트럭 위에 올라타 보급품을 아래에 있는 아이들에게 집어던졌다. 이들은 ‘얌생이’라고 불렸다. 당시 미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얌생이들이 따라붙었다. 목숨을 건 절도 행위였다. 얌생이들이 길에 떨어져 크게 다치거나 미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미국과 일본에서 생산해 비싼 돈을 주고 들여온 군수물자를 도둑맞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보급창에서 상자 100개를 싣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50개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얌생이들을 잡으려고 매번 차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를 멈추었다가 트럭째 도둑맞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한국인은 도둑질만 한다’는 편견을 갖게 된 미군은 한 트럭에 몇 만 달러나 되는 군수품의 수송을 한국 업체에 선뜻 맡길 수 없었다. 인천과 부평에서 동두천과 의정부 등지로 가는 미군 군수물자를 수송해보기로 결심한 조중훈은 미군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일단 작은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조중훈은 캔맥주에 주목했다. 캔맥주를 옮기는 일이 당장은 큰돈이 안 되더라도 신뢰를 쌓기에는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처음엔 지더라도 나중에 이기면 된다고 믿었다. 투자도 없이 이익만 바라는 것은 사업이라기보다 도박이나 투기에 가깝고, 항상 이기기만 바라는 것은 오만이라고 여겼다. 처음에 지는 것을 손해가 아니라 나중에 이기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중훈은 군용 캔맥주를 한시적으로 대리수송 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미군과 직접 계약한 것이 아니라 미군과 계약한 큰 업체의 하청을 받아 대리수송 해주는 일이었지만, 미군부대에서 신원보증서와 차량 사전검사필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미군부대에 출입하는 길이 열린 셈이다.
미군 물자 대리수송은 오늘날 물류 개념으로 보면 수송 부문을 아웃소싱하는 ‘3자 물류 3PL’다. 조중훈은 60년 전에 3자 물류를 생각해낸 것이다. 미군 운송의 문제점은 조중훈뿐 아니라 누구나 봤고 알고 있었지만,
조중훈은 같은 상황을 보고도 그걸 보자기에 싸 사업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조중훈은 경쟁사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항구에 있는 미군 군수창고는 일과시간에만 문을 열어주어 먼 곳에 있는 배송지까지 갔다
오면 날이 저물어 하루에 한 번밖에 수송하지 못했다. 조중훈은 창고에서 물건을 받아오면 배송지로 바로 가지 않고 집 마당에 물건을 부려놓고 한 번 더 창고에서 물건을 실어왔다. 그렇게 해서 다른 업체들과 달리 하루 두 차례 수송을 할 수 있었다.
세단과 부암장
당시로서는 캔맥주 운송권을 따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지만, 조중훈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큰 사업권을 따내려면 미군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매일같이 업무가 끝나면 조중훈은 직원들을 데리고 부두로 나가 미군들이 하역하는 것을 도왔다. 미군 트럭에 문제가 생기면 고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조중훈의 이름 석 자가 미군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미군들도 점차 조중훈에게 신뢰를 갖게 되었다.
조중훈은 매사를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입각해 처리하는 미국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이 믿을 만한 파트너임을 알게 하고 동등한 계약당사자로서 당당함을 지켜나가려고 애썼다. 미군과의 계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계약이었기 때문에 이쪽 입장도 존중되었던 것이다. 불필요하게 저자세로 사정하기보다는 어엿한 기업가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에서 조중훈은 미군과 만날 때 지프차가 아니라 당시에 구경하기조차 힘들던 고급 세단을 타고 다녔다. 한진상사가 잘나가는 중소기업이긴 했지만 세단을 타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돈 많고 힘 있는 한국사람들은 군용지프를 개조해 타고 다녔다. 그런데 군용지프가 나올 만한 구멍이란 게 미군부대밖에 없었다. 한국사람 딴에는 자가용인 양 타고 다니지만 미군들 눈에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군용차를 부정한 방법으로 장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조중훈은 자신이 당당한 계약당사자이며 사업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비싼 세단을 구입해 타고 다녔던 것이다. 미군들이 쓰던 중고 지프를 몰고 다녀서는 평생을 가도 동등한 거래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당한 사업가로 이미지를 관리해 고객의 신뢰를 얻어낸 것이다. 조중훈은 아무리 계급이 높은 미군에게도 허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았다. 그런 인사는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굴하게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에게 결정적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부암장 송별회’였다. 한번 알게 된 미군 장교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별장인 부암장에 초대해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부암장은 지금 서울 부암동에 있는 자택인데 미완성 석조건물을 구입해 완공한 것이었다. 이곳에 특급 국제호텔의 요리사를 초빙해 풀코스 식사를 대접했다.
미군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길’ 하면 먼지투성이요, ‘집’ 하면 판잣집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미군들에게 한국은 거지가 들끓는 더럽고 못사는 나라, 아이들이 초콜릿을 달라며 달라붙거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올라 물건을 훔쳐가는 나라였다. 그런 미군들에게 유럽풍의 중후한 석조건물과 본국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풀코스 만찬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조중훈은 미군 장교뿐 아니라 그 아내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해 전달했다.
하지만 송별회 자리에서 사업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저 친구 대 친구로 맛있게 저녁이나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식사 때 사업이야기는 금물’이라는 유대인의 상술에서 배운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자기에게 소용이 닿는 사람이 아니면 잘해주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미군 장교들은 한국에 있는 동안이 아니고 떠날 때 송별파티를 열어주고 선물까지 안겨주는 ‘통큰’ 한국인 사업가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부탁을 들어달라든지, 편의를 봐달라든지 하는 말도 일절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무슨 청탁할 일이 있어 접대를 하나 생각했던 미군 장교들은 그의 한결같은 매너에 호감을 갖게 되었고, 떠날 때 후임자에게 조중훈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신뢰는 신규고객을 단골고객으로, 단골고객을 충성고객으로 전환하는 원동력이다. 두터운 신뢰감은 기업의 성장과 존속을 위한 핵심요소다. 오늘날 신용은 사업에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지금처럼 고도화한 사회에서 기업은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하지 않으면 지속성장할 수 없다.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신용과 신뢰다. 조중훈은 일찍이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데 공을 들였다. ‘사회적 자본’ 개념은 2000년대 이후 체계화되었다는 점에서 조중훈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펜타곤에서도 수송장교 출신이면 조중훈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한국을 거쳐 간 그 많은 장교에게 환송회를 해주었으니 한진코리아와 조중훈을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가 심어놓은 인맥의 씨앗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땅에서 싹을 틔웠다. 본국에 돌아가 국방부 고위직이 된 미군 수송장교들은 훗날 조중훈이 베트남에서 엄청난 기회를 잡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남대문시장의 군용파카
캔맥주 대리수송으로 미군에게 신뢰를 쌓은조중훈은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미 8군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사령관께. 한진코리아 CEO, 조중훈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천과 부평에서 들어오는 군수물자의 절반 이상을 도난당하고 있습니다.
군수물자를 우리 한진에 맡겨준다면 정확하게 수송하겠습니다. 수송 중에 물자를 분실하면 한진상사가 전액 변상하겠습니다. 단, 대금은 달러로 지급해주기 바랍니다.」
트럭 30대 규모의 조그만 한국 업체가 트럭 한 대분당 수만 달러에 이르는 미군 군수품을 수송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미8군 사령관은 수송담당관에게 검토를 지시했다. 조중훈의 신용을 확신하고 있던 수송담당관은 긍정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몇 달의 협상 끝에 미 8군 구매담당관이 한진상사의 차고와 정비시설을 둘러보고 갔다. 그리고 1956년 11월 1일 미 8군 군수참모부장실에서 7만 달러 규모의 첫 계약이 이루어졌다. 한진상사가 당시 수송업체로는 유일하게 자체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도 미군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송 도중 사고로 인한 손해는 한진상사가 모두 배상하는 대신 수송에 필요한 유류는 미군 측에서 현물로 지급하기로 했다. 기름 구하기가 어렵던 당시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계약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에 7만 달러짜리 계약서에 서명하면서도 조중훈은 애써 기쁨을 억눌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년에는 더 좋은 조건으로 더 큰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은 한진상사 창립 11주년 기념일이었다. 첫 해의 7만 달러짜리 계약을 키우고 키운 결과, 1959년에 한진상사는 수십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군수품뿐 아니라 물까지 수송하게 되면서 계약고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조중훈이 미군에게 확실한 신뢰를 얻게 된 극적인 사건이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파카를 차떼기로 팔아먹은 것이다. 어렵사리 미군의 신뢰를 얻어가고 있던 때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운전기사는 인수장에 미군의 사인까지 받아왔다. 서류가 있으니 변상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조중훈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조중훈은 지고 이기는 길을 택했다. 도난품이 남대문시장에 넘겨질 것이라 판단하고 직원들을 보내 시장을 지키게 했다. 예상대로 물건이 나돌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상인들의 원성만 살 뿐, 물건은 자취를 감추기 십상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이라 파카는 아직 팔리지 않은 상태였다. 조중훈은 장물을 취득한 상인에게 약간의 이문까지 보태주고 1,300벌에 달하는 파카를 되사왔다. 파카 구입비용으로 사채시장에서 3만 달러나 융통했다. 빚을 내 신용을 산 것이다.
이 일은 금전적으로는 큰 손해였지만 미군에게 변상금이 아닌 현물을 인계했을 뿐 아니라 미군에게 확고한 신용을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군들은 한진과 조중훈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달라졌다. 조중훈은 3만 달러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믿음을 얻었다. 조중훈은 한 걸음 한 걸음 견실하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 지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욕심을 버리고 신용을 두텁게 쌓아갔다. 지고 이기는 지혜로 신뢰를 쌓아가야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진상사의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해갔다. 미 8군과 본격적인 수송 계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957년 1월, 자본금 1,000만환의 법인 한진상사주식회사으로 전환했다. 본사도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그해 10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한 이래 해마다 세 배 이상 성장했다. 1960년에는 한 해 동안 22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보유차량이 500대에 이르렀다.
경쟁에도 도리가 있다
조중훈은 소모적인 과당경쟁은 피했다. 경쟁에서도 도리를 중시했으며 경쟁사와도 동반성장할 수 있는 상생경영을 실천했다. 기업은 업계 발전을 도모하고 국익에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이 개척해 기반을 닦아놓은 사업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불필요한 경쟁만 유발하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중훈은 운수업체간 소모적인 과당경쟁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미군과의 계약고를 담보로 돈을 빌려 새 차를 사 한진상사 단독으로 용역을 수행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조중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기도 일대 운수업자들의 차량을 고루 이용하는 용차 傭車방식을 택했다. 굳이 용차를 고집한 것은 운수업자들이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에 뛰어들 것을 염려해서였다. 운수업자들과 적정 이윤을 나누는 방법을 통해 불필요한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경쟁을 하더라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순리에 맞게 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중훈에게도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업이 있었다. 1961년 서울-인천을 운행한 국내 최초의 지정좌석버스 사업이 그것이다. 주한미군에 버스를 납품하고 있는 일본인 사업가를 주일미군 장성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 사업가는 버스를 2년마다 새 차로 교환해주고 있었다. 조중훈은 그에게서 일본으로 되돌아갈 중고 버스 20대를 장기할부로 인수해 서울-인천 노선에 투입했다.
당시 짐짝 싣듯 하던 시외버스와 만원열차에 시달리던 인천 시민들은 한진이 직행지정좌석버스를 운행하자 반색했다. 그러나 기존 업계의 거센 반발과 견제로 한진은 신도로를 달릴 수 없었다. 도로에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억지를 부리며 신도로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선발업체들과 싸우려고 했다면 싸울 수도 있었다. 조중훈은 그러지 않았다. 번듯한 신도로를 놔두고 구도로를 이용했다. 김포사거리에서 뒷길을 따라 내리 쪽으로 빠져나가 배다리를 거쳐 동인천으로 나가는 구도로는 먼지가 앞을 가로막는 비포장길이어서 정시운행이 불가능했다. 조중훈은 길을 닦아가며 정시운행에 만전을 기했다. 마른 날에는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차를 동원해 물을 뿌려가며 운행하고, 비가 온 다음 길이 울퉁불퉁해지면 버스가 덜컹대지 않도록 불도저와 그레이더를 투입해 길을 닦았다. 구도로도 한진이 운행하는 동안에는 신도로 못지않아 승객은 늘 만원이었다.
하지만 도로를 정비하느라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적자를 보며 언제까지 운행할 것인가가 업계의 관심사였고 한진 직원들도 언제까지 길을 닦으며 운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조중훈은 지고 이긴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한진 좌석버스가 항상 만원임을 보여주면 구도로로 다니든 신도로로 다니든 다른 버스회사들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꾸준히 운행한 지 반년이 안 돼 업계도 한진버스의 경쟁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한진버스는 새로 개통된 경인가도를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좌석버스는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후에 전국을 연결하는 한진고속버스의 기틀이 되었다. 한진고속은 차내에서 비디오를 상영하는 등 참신한 서비스를 개발해 화젯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1961년 순탄하던 미군 수송용역 사업도 고비를 맞게 되었다. 미국정부가 국제수지 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바이아메리칸 정책 Buy American Policy’을 채택했는데, 그 여파가 한국 내 수송용역에까지 미쳐 계약조건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단가도 박해진데다 몇 년 동안 한진상사에 용차를 들여놓고 있던 업체가 갑자기 경쟁상대로 돌변해 입찰에 덤핑으로 들어왔다. 덤핑입찰로 그 업체가 군납권을 따내게 되자 한진상사에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미군도 어쩔 수 없이 거래처를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부족 차량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한진상사의 차량을 배정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한진에 대한 미군의 신뢰는 이처럼 절대적이었다.
이듬해에도 그 업체는 계속 덤핑으로 치고 들어왔다. 조중훈도 더 낮은 가격으로 응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면 업계 전체의 공멸을 자초할 뿐임을 알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경쟁을 피한 것이다. 덤핑업체 때문에 한진상사는 물론이고 그 동안 한진상사에 용차를 놓아 높은 가격으로 사업하던 경인지역 수송업체 모두가 낮은 단가를 적용받게 되었다. 덤핑입찰로 계약권을 따낸 업체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제 살 깎아먹기가 된 것이다. 게다가 수송 중에 도난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고 이문이 없다 보니 용차대금을 지급하지 못하기 일쑤여서 군소 차주들의 반발로 적시수송에도 문제가 생겼다. 결국 1963년을 마지막으로 그 덤핑업체는 용역군납 자격을 상실하고 도산했다. 미군 수송용역은 다시 한진상사로 넘어오게 되었지만 조중훈은 못내 씁쓸했다.
버스사업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리를 잡아가던 1959년 한진상사는 당시 ‘대한민국 경제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었다. 사업이 번창하고 안정궤도에 올라섰지만,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무언가 획기적인 사업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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