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마저 삼킨 오디세이

공작신동

서울 미동초등학교와 휘문중학교는 대한민국 항공사 史에 빛나는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우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다. 안창남은 1914년 경성미동공립보통학교 지금의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 지금의 휘문중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 오쿠리 小栗비행학교에서 유학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안창남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또 한 명의 항공인이 바로 한진그룹을 창업한 조중훈이다. 조중훈 역시 미동보통학교를 나와 휘문고보를 다니다 중퇴하고 해원양성소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훗날 대한항공이라는 세계의 날개를 활짝 폈다.

조중훈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2월 11일 음력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아버지 조명희 선생과 어머니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토박이로 살아온 조중훈의 집안은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형편이 넉넉했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과학과 수학 성적이 뛰어났다. 공작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다. 여덟 살이던 어느 날, 조중훈은 집에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라댔다. 재봉틀을 뜯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귀한 재봉틀이 못쓰게 될까봐 보채는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하루 종일 졸라댔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허락했고,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드라이버를 움켜쥐더니 부속품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해체된 부속품들이 마룻바닥에 놓여졌다. 어머니가 재봉틀을 버리게 되었다며 체념하고 다시는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야단치려는 순간, 아이는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기름 묻은 손으로 훔치더니 부품을 하나씩 집어 들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는 가족들을 불렀고, 아이는 신통하게도 분해한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내 역순으로 조립했다.

기계라고 생긴 것은 일단 뜯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은 놀라운 재능으로 발전했다. 해방 이후 한진상사를 창업한 직후에도 기계에 얽힌 일화가 있다. 당시 조중훈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집이 있는 서울과 회사가 있는 인천을 오갔는데, 한번은 금강산에 다녀오는 길에 엔진이 고장 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시골마을에서 오토바이를 수리할 곳은 없었다. 하지만 조중훈은 기어이 고쳐서 타고 돌아가겠다며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 어느 집 처마에 걸려 있는 질긴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꼬고 엮어 엔진 실린더가 새는 것을 막았더니 신기하게도 시동이 걸렸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중훈의 기계를 다루고 고치는 천재성은 훗날 수송사업을 할 때도 빛을 발했다. 트럭 엔진 소리만 들어도 몇 번 실린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맞힐 정도였다. 정비사가 혹시나 하고 뜯어보면 틀림이 없었다. 기계에 대한 관심과 재능은 정비가 생명인 수송업에서 만전을 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조중훈의 재능은 아버지에게는 칭찬거리가 되지 못했다. 조용히 학문에 열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큰아들과 달리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기술자보다 공부로 출세하기를 바랐다. 뚝딱뚝딱 뜯고 고치며 집 안 곳곳을 어질러놓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아버지는 ‘지나치게 동 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 靜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 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어린 정석은 정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동적이었다. 꿈과 모험심은 끊임없이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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