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논의 전설

사업은 타이밍

1965년 어느 날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조중훈을 찾았다. 베트남에 파병과 함께 한국용역군납조합을 만들기로 했다며 조중훈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베트남전이 확대되자 미국은 천문학적인 전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6.25 때 일본이 군수경기를 타고 막대한 외화를 번 것처럼 베트남전에서 우리나라도 사업 기회가 있을 것으로 내다본 조중훈은 흔쾌히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한국에서 간접적으로 주워듣는 베트남 소식만으로는 사업구상이 불가능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 국방부와 접촉해야 한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펜타곤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은 해마다 교체되었기 때문에 조중훈은 미군 용역사업을 수행하는 10년 동안 수많은 미군 간부와 안면을 익혔다. 특히 고위 장교들의 뇌리에는 아내를 위한 선물까지 준비된 ‘부암장 송별파티’와 품위와 신용을 잃지 않던 ‘의리의 사업가’가 각인되어 있었다.

펜타곤에 돌아온 미군들은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조중훈을 격려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중훈을 직접 알지 못하는 미군 관리들도 한진이 주한미군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자료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캐비닛 하나를 가득 채운 방대한 양의 서류철에는 조중훈과 한진이 얼마나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업무를 추진했는지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워싱턴에서 40일 넘게 머물면서 조중훈은 베트남 상황을 낱낱이 파악한 다음 사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펜타곤에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펜타곤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추천서까지 써주면서도 결정권은 베트남 현지 사령관에게 있으니 그곳에서 승부를 걸어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조중훈은 그해 12월 경제시찰단을 꾸려 동남아 순방에 나섰다. 시찰단이 탄 비행기는 베트남 퀴논항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조중훈은 좁은 창으로 넓은 퀴논항을 내려다보았다. 항구는 그야말로 ‘물 반 배 반’이었다. 미국과 홍콩 등 각지에서 물자를 싣고 온 대형 선박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정박하고 있었다.

순간 조중훈은 직감적으로 그런 정체가 하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역을 기다리는 선박들을 보자마자 사업아이템을 잡았다. 함께 간 기업인들이 볼세라 조중훈은 눈으로 사진을 찍어둔 다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실 옆사람들이 퀴논항에 정박한 배들을 보았다고 해도 조중훈처럼 사업아이템을 잡지는 못했을 테지만, 조중훈에게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 가슴 벅찬 광경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조중훈은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한진상사는 수송에서는 상당한 경험을 쌓았지만 하역은 생소했다. 우선 인천과 부산 하역장에서 화물 처리과정을 파악했다.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하역요율표를 구해오고, 미국 브루클린을 비롯한 주요 국제항구의 하역 자료도 수집했다.

이듬해 1월 설을 앞두고 조중훈은 동생 조중건과 함께 다시 베트남으로 길을 잡았다. 조중건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한진상사에 합류해 있었다. 6.25 때 미군 통역장교로 활약한 뒤 미美 포병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조중건도 미군과 인맥이 좋았다. 사이공에 도착한 형제는 미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그곳에도 낯익은 인물들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받아온 펜타곤의 추천서는 조중훈이 베트남에서 구상한 사업에 공신력을 더해주었고, 미군 장교들은 예전 부암장에서 받은 호의에 보답하듯 퀴논으로 가는 헬기까지 내주었다.

조중훈은 퀴논을 베트남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사이공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컸지만 퀴논에는 한국의 맹호부대가 가까이 있어 안심이 되었다. 퀴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예상대로 군수물자 하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조중훈은 군수물자를 적군일지도 모를 베트남 업체에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한진상사에 맡겨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군 수송책임자는 일감을 얻고 싶으면 공개입찰에 참여하라고 일축했다. 하역 경험이 없는 한진상사에 수의계약으로 일을 맡길 순 없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인력과 장비를 들여와야 하는 한진상사 입장에서는 베트남 업체와 경쟁하면 승산이 없었다. 파격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한진상사에 맡겨주면 100일 안에 작업을 시작해 사흘에 한 척씩 하역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들은 1주일에 한 척도 하역을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책임자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조중훈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겠다”고 승부수를 던졌다. 대신 하역비를 국제기준가의 세 배로 달라고 했다. 언제 게릴라들이 습격할지 모르는 위험한 현장에서 철야작업을 하는데 그렇게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미군 측은 조중훈의 제안에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긴박해지는 전장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자체의 하역작업으로는 밀려드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는 데다 월맹군이 잠입해 있을지도 모르는 베트남 업체에 하역작업을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중훈은 바로 그런 딜레마를 꿰뚫고 있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조중훈은 주월미군사령부에서 군수담당 부사령관 앵글러 중장과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금 790만 달러. 10년 전 한국에서 미군과 맺은 첫 계약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조중훈은 상대의 것을 빼앗는 협상이 아니라 쌍방 모두 득이 되는 협상을 했다. ‘분배적 협상’에 지나지 않는 제로섬 zero sum게임이 아니라 ‘통합적 협상’을 추구하는 포지티브섬 positive sum게임을 즐긴 것이다.

한국의 다른 기업들이 미국기업의 하청을 받는 간접계약 형식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데 반해 한진은 주월미군사령부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퀴논항 상공에서 한눈에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동물적 감각과 오래도록 쌓아온 신용이 빚어낸 쾌거였다. 조중훈은 이 계약을 통해 베트남에서 성공을 예감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