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타이밍
1965년 어느 날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조중훈을 찾았다. 베트남에 파병과 함께 한국용역군납조합을 만들기로 했다며 조중훈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베트남전이 확대되자 미국은 천문학적인 전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6.25 때 일본이 군수경기를 타고 막대한 외화를 번 것처럼 베트남전에서 우리나라도 사업 기회가 있을 것으로 내다본 조중훈은 흔쾌히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한국에서 간접적으로 주워듣는 베트남 소식만으로는 사업구상이 불가능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 국방부와 접촉해야 한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펜타곤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은 해마다 교체되었기 때문에 조중훈은 미군 용역사업을 수행하는 10년 동안 수많은 미군 간부와 안면을 익혔다. 특히 고위 장교들의 뇌리에는 아내를 위한 선물까지 준비된 ‘부암장 송별파티’와 품위와 신용을 잃지 않던 ‘의리의 사업가’가 각인되어 있었다.
펜타곤에 돌아온 미군들은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조중훈을 격려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중훈을 직접 알지 못하는 미군 관리들도 한진이 주한미군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자료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캐비닛 하나를 가득 채운 방대한 양의 서류철에는 조중훈과 한진이 얼마나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업무를 추진했는지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워싱턴에서 40일 넘게 머물면서 조중훈은 베트남 상황을 낱낱이 파악한 다음 사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펜타곤에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펜타곤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추천서까지 써주면서도 결정권은 베트남 현지 사령관에게 있으니 그곳에서 승부를 걸어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조중훈은 그해 12월 경제시찰단을 꾸려 동남아 순방에 나섰다. 시찰단이 탄 비행기는 베트남 퀴논항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조중훈은 좁은 창으로 넓은 퀴논항을 내려다보았다. 항구는 그야말로 ‘물 반 배 반’이었다. 미국과 홍콩 등 각지에서 물자를 싣고 온 대형 선박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정박하고 있었다.
순간 조중훈은 직감적으로 그런 정체가 하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역을 기다리는 선박들을 보자마자 사업아이템을 잡았다. 함께 간 기업인들이 볼세라 조중훈은 눈으로 사진을 찍어둔 다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실 옆사람들이 퀴논항에 정박한 배들을 보았다고 해도 조중훈처럼 사업아이템을 잡지는 못했을 테지만, 조중훈에게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 가슴 벅찬 광경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조중훈은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한진상사는 수송에서는 상당한 경험을 쌓았지만 하역은 생소했다. 우선 인천과 부산 하역장에서 화물 처리과정을 파악했다.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하역요율표를 구해오고, 미국 브루클린을 비롯한 주요 국제항구의 하역 자료도 수집했다.
이듬해 1월 설을 앞두고 조중훈은 동생 조중건과 함께 다시 베트남으로 길을 잡았다. 조중건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한진상사에 합류해 있었다. 6.25 때 미군 통역장교로 활약한 뒤 미美 포병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조중건도 미군과 인맥이 좋았다. 사이공에 도착한 형제는 미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그곳에도 낯익은 인물들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받아온 펜타곤의 추천서는 조중훈이 베트남에서 구상한 사업에 공신력을 더해주었고, 미군 장교들은 예전 부암장에서 받은 호의에 보답하듯 퀴논으로 가는 헬기까지 내주었다.
조중훈은 퀴논을 베트남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사이공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컸지만 퀴논에는 한국의 맹호부대가 가까이 있어 안심이 되었다. 퀴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예상대로 군수물자 하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조중훈은 군수물자를 적군일지도 모를 베트남 업체에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한진상사에 맡겨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군 수송책임자는 일감을 얻고 싶으면 공개입찰에 참여하라고 일축했다. 하역 경험이 없는 한진상사에 수의계약으로 일을 맡길 순 없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인력과 장비를 들여와야 하는 한진상사 입장에서는 베트남 업체와 경쟁하면 승산이 없었다. 파격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한진상사에 맡겨주면 100일 안에 작업을 시작해 사흘에 한 척씩 하역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들은 1주일에 한 척도 하역을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책임자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조중훈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겠다”고 승부수를 던졌다. 대신 하역비를 국제기준가의 세 배로 달라고 했다. 언제 게릴라들이 습격할지 모르는 위험한 현장에서 철야작업을 하는데 그렇게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미군 측은 조중훈의 제안에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긴박해지는 전장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자체의 하역작업으로는 밀려드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는 데다 월맹군이 잠입해 있을지도 모르는 베트남 업체에 하역작업을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중훈은 바로 그런 딜레마를 꿰뚫고 있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조중훈은 주월미군사령부에서 군수담당 부사령관 앵글러 중장과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금 790만 달러. 10년 전 한국에서 미군과 맺은 첫 계약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조중훈은 상대의 것을 빼앗는 협상이 아니라 쌍방 모두 득이 되는 협상을 했다. ‘분배적 협상’에 지나지 않는 제로섬 zero sum게임이 아니라 ‘통합적 협상’을 추구하는 포지티브섬 positive sum게임을 즐긴 것이다.
한국의 다른 기업들이 미국기업의 하청을 받는 간접계약 형식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데 반해 한진은 주월미군사령부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퀴논항 상공에서 한눈에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동물적 감각과 오래도록 쌓아온 신용이 빚어낸 쾌거였다. 조중훈은 이 계약을 통해 베트남에서 성공을 예감했다.
숨막히는 약속의 백일
조중훈은 자신감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임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한진이 감당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중훈은 “사업은 타이밍”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반대를 물리쳤다. 이것은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경영원칙이었다. 타이밍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포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조중훈은 ‘시간경영’에 선구자적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타이밍은 지혜와 감각으로 포착해야 한다. 조중훈의 이런 기회 포착의 예지는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은 “경험을 통해 배우며 경험의 힘이 기회포착 능력을 가져온다”고 했다.
조중훈은 한진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트남에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선 재무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퀴논에 지사를 설치했다.
동시에 미군과의 계약 이행을 위해 필요한 자금과 장비, 인력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정부의 지불보증을 받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부족한 돈은 사채시장을 돌며 조달했다. 당시 명동 사채업자들이 서로 자기 돈을 써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몇 달 동안 사채시장에 돈이 말라버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미군은 계약 당시 운송수단으로 미국산 트럭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조중훈은 포드, GM, 크라이슬러 등에 문의했다. 그러나 출고까지 90일이나 걸린다는 답변이 왔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베트남까지 수송하는 기간까지 감안하면 조중훈이 장담한 대로 100일 안에 하역 준비를 마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사업권을 따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십만 달러의 벌금까지 물어야 할 판이었다. 조중훈은 일본으로 갔다. 운송업을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100일의 약속’을 지키고 말겠다는 조중훈의 확고한 의지를 읽은 지인들은 자신들이 주문해놓은 차량까지 기꺼이 내주었다. 160만 달러 상당의 다른 장비도 일본 지인의 보증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역시 아무 담보 없이
조중훈의 신용을 믿고 지원한 것이다. 신의를 지키기 위해 조중훈은 서울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융통해 석 달 후 150만 달러를 우선 갚았다.
일본산 트럭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미군 측은 계약위반이라며 반대했다. 조중훈은 지금 미국산 트럭은 기간 안에 조달할 수 없으니 그것이야말로 계약위반이 될 거라고 응수했다. 일제 트럭은 운전석이 오른쪽이어서 현장에서 운전하기 힘들었지만 조중훈은 좌우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인력은 한진의 정규직 200명과 신문광고를 보고 몰려든 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아무 기술도 없이 전쟁터에서 한몫 챙겨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현장에서 기술을 가르치기로 했다. 숨막히는 조달전 戰을 치르고 정확히 98일 만에 한진상사의 장비와 선발대 300명을 실은 화물선이 퀴논항에 도착했다. 100일 전에 하역 준비를 완료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선발대가 퀴논항에 도착했지만,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였다. 숙소로 사용할 만한 건물도 없었고, 천막도 군수품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출항할 때 헌병에게 압수당해 가져오지 못했다. 미군과의 계약서에는 의식주 문제를 자체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선발대는 맹호부대를 찾아가 천막, 침대, 모기장, 담요, 식기를 2주만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맹호부대는 기꺼이 물품을 내주었다. 조중훈은 맹호부대에서 빌려온 천막을 쳐놓고 미군부대를 찾아가 따졌다. 계약관계도 없는 맹호부대도 도와주는데 미군이 이럴 수 있느냐고 했다. 궁색해진 미군 군수책임자는 필요한 것을 얘기하면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한진상사는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첫 임무를 받았다.
「미군 수송함이 싣고 온 1,500톤의 군수품을 하역해 인근에 있는 미 27수송대대 기지창까지 운반할 것.」
한국에서 채용한 직원의 상당수는 아직 퀴논항에 도착조차 못하고 있었다. 조중훈은 첫 임무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내느냐에 따라 베트남에서의 사업 성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연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중훈은 선발대를 진두지휘해 군수품 하역을 시작했다. 잠도 자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갑판과 부두를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첫 임무로 주어진 1,500톤을 운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2시간이었다. 미군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정도면 1주일은 족히 걸렸을 작업량이었다. 한국에서 직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하역 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를 싣고 오는 배들은 하역을 기다리며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미군의 하역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선박들이 밀려들어 수십 척이 정박해 기다리기 일쑤였다. 배에서 기다리는 게 지루한 선원들은 육지에 내려 며칠씩 음주가무를 즐기며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한진이 맡으면서 항구에 도착하는 족족 하역이 이루어져 더는 기다리는 배가 없게 되었다. 퀴논항에 도착하면 휴가를 보내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왔던 선원들은 하룻밤도 머물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한진에 맡겨진 업무는 전략물자와 식료품을 퀴논항에서 하역해 반경 25마일 안에 주둔한 미군부대로 운송하는 것과, 안케와 듀코 두 도시를 왕복하며 운송하는 것이었다.
미군 군수물자를 부두의 크레인에서 트럭으로 옮기는 기술자들의 동작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민했다. 작업 현장은 전장 그대로였다. 월맹군의 기습을 의식한 공포감, 보급물자를 약속시간 내에 운반해야 한다는 강박감, 달러를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의욕이 어우러진 숨막히는 드라마였다. 초인적인 단합과 조화에 누구라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은 도대체 한진이 어떤 회사이기에 미국회사와 나란히 용역을 맡았는가, 어떻게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업무를 수행해내는가에 호기심을 가졌다.
사선을 넘는 수송용사들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온 한진 직원들은 변변한 작업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중훈은 현장을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운송 기술을 가르쳤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조중훈은 안전의식을 각인시키기 위해 숙소와 식당, 작업장, 운전대 앞창에 이런 표어를 써 붙였다.
「나의 안전은 가족의 안전!」
베트남은 전선 없는 전장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조중훈은 처음부터 현장을 직접 감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역이 집중되는 퀴논항 주변은 월맹군의 기습공격이 잦았다. 안케와 듀코 사이 왕복노선에는 중부 고원지대의 전략도시인 플레이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탕! 탕! 탕!’
수송작업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퀴논항에서 하역을 마치고 목적지로 이동하던 한진 수송단에 월맹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육상운송은 한진의 수송차량 수백 대가 꼬리를 물고 이동했는데 월맹군의 기습에 대비해 기관총을 장착한 건트럭 gun truck이 수송트럭 10대당 한 대씩 따라붙었다. 월맹군의 타깃은 건트럭 이었지만, 한진의 수송트럭 운전사들도 총격에 대비해 철모를 쓰고 운행했다.
총성이 들리자 운전사들은 반사적으로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얼른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하도록 철저하게 훈련했다. 미군 쪽 화력이 월맹군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교전이 벌어져 차량이 타격을 받아도 기사들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트럭 밑에서 몸을 피하고 있다가 교전이 끝나면 다시 이동했다.
그날은 달랐다. 타깃은 건트럭이 아니라 수송트럭이었다. 월맹군들은 아예 수송트럭을 겨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심지어 트럭 밑으로 들어간 기사들까지 조준해 쏘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건트럭 위의 미군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기사들을 엄호하며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즉각 반격하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전장에서 수년째 고락을 함께한 동료나 다름없는 한진 기사들이 희생되는 모습에 미친 듯이 응사했다.
인근 부대에서 지원병이 급파되었지만 수송단 중 세 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다섯 명이 중상을 입은 뒤였다. 기사들은 동료들의 갑작스런 사상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돌아가겠습니다. 목숨보다 중한 게 어디 있습니까?”
조중훈은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수송트럭 대열을 맨 앞에서 진두지휘했다. 이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조중훈은 솔선수범으로 패닉상태에 빠진 직원들을 신속하게 통솔할 수 있었다. 이러한 리더십은 자기희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에는 숙소로 사용하는 배가 월맹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조중훈은 급히 피신하다 발을 다치고 말았다. 하지만 부상을 당하고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수시로 하역작업을 둘러보았다.
피습사고 후 조중훈은 강력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현지에서 전역한 맹호부대 대원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전투경험을 갖춘 군 출신 직원들은 한진이 사선을 뚫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수송 도중 월맹군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지금도 미국 국방부 군사박물관에 걸려 있다.
베트남의 마음을 사다
직원과 현지인이 조중훈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면 베트남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중훈은 현지에서 늘 솔선수범했다. 홍콩에서 건조한 바지선도 조중훈이 직접 퀴논항으로 가지고 왔다. 한번은 바지선이 퀴논항에 도착할 무렵 파도가 거세게 쳤다. 그러자 예인선에 연결된 밧줄이 풀려 금방이라도 바지선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반사적으로 뛰어가 밧줄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조중훈이었다. 깜짝 놀란 직원들이 부랴부랴 달라붙어 힘을 모았다. 다행히 바지선을 무사히 항구까지 끌어왔는데, 당시 직원들은 위기상황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조중훈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번은 홍콩에서 베트남 하역 작업에 투입될 바지선의 건조 상황을 살펴보다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상처가 깊어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조중훈은 중국 인부들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며 몸을 돌보지 않았다. 병원에 가지 않고 그들과 숙식을 함께할 것을 고집하다 끝내 상처가 곪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부상을 입었을 때도 목발을 짚고 야간순시를 했다. 순찰 중에 피곤해 졸고 있는 불침번이 있더라도 조중훈은 안쓰러운 마음에 깨워서 야단치는 대신 머리맡에 쪽지를 하나 남기고 갔다.
「이 사람아, 자네만 자면 어떡하나?」
조중훈은 직원들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다. 직원들이 아침에 잠을 깨면 입이 칼칼하니 북어국을 끓여주고 싶다며 한국에서 북어를 공수해 가기도 했다. 그 후로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배에는 언제나 북어가 가득 실렸다.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며 베트남 현지에 김치공장까지 지었다. 아열대 기후라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 탓에 배추는 베트남 고산지대에서 공수해 와야 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을 때 베트남 현지의 한진 직원이 4,000명에 달했는데,
조중훈은 베트남 현지 직원의 복지에 만전을 기했다. 김치공장 직원만 80명에 이르렀다. 세계 최초의 김치공장이었다. 조중훈의 아내도 큰 역할을 했다. 남편을 이역만리 전장에 보낸 후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던 아내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전장으로 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치공장에서 김치를 담그고 식당에서 직원들에게 밥을 퍼주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돈을 벌겠다고 머나먼 전장에서 위험천만한 수송작업을 하던 한진 직원들은 어머니처럼 헌신하는 그녀의 모습에 큰 위안을 받았다.
조중훈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에게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한국군 군복을 입은 사람이 한진상사를 방문하면 누구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도록 했다. 미군 시레이션이나 찐밥이 입에 맞지 않은 한국병사들은 한진상사에서 정성스럽게 주는 밥에 김치와 찌개를 먹는 맛에, 외출이나 외박을 나오면 한진상사부터 찾았다. 조중훈은 한진상사 직원들이나 파월 장병들이나 모두 이역만리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며 일하고 있는 만큼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진상사의 배려로 한국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조중훈은 베트남 현지인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직원들에게 베트남 주민에게 폐를 끼치거나 탈선행위를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지시했다. 이를 어기는 직원은 즉시 귀국시켰다. 조중훈은 현지인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와서 돈만 벌어간다는 반감이 일고 있었다. ‘어글리 코리안 ’이란 비난도 들려왔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 조금만 실수를 해도 감정을 다칠 수 있었다. 조중훈은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현지화 정책을 위해 한진의 수송 작업에 베트남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안전과 교통사고 처리를 위해 언어가 통하는 현지인을 고용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한진 직원 간에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들이 만족할 만한 보상을 신속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대민지원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자재로 쓰고 남은 나무는 인근 주민에게 땔감으로 나누어주고 의무실 문을 열어 무료 진료를 해주기도 했다.
베트남인을 고용하기 위해 현지인을 위한 기술훈련소를 설립해 한국어와 기술도 가르쳤다. 김치공장에서도 베트남 여성을 우선 채용했다. 현지인의 취업률이 점차 높아지자 현지인에 대한 취업 규칙을 따로 제정해 공정한 노무관리를 하도록 만전을 기했다. 작업현장에 있는 기술훈련소에서 주민들에게 무료로 기술교육을 제공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의 사업이 절정에 달한 1968년 당시 한진 베트남지사 직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현지인이었다.
한진에서 일하는 현지 여성이 걸어갈 때 뒷모습만 봐도 한진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 현지인들은 전쟁 중이라 잘 먹지 못해 마른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한진에서 3~4년 일하면 여성들이 잘 먹어서 허리가 굵어진다는 것이었다.
조중훈의 현지화 정책은 베트남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덕분에 한진 직원에 대한 월맹군의 기습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반미시위가 거세게 일어났을 때도 한진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월맹군이 한진만 공격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한진과 월맹군이 내통하는 것 아니냐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종종 현지에서 채용한 베트남 직원들과 마을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베트남 직원들은 “이곳엔 가면 안 된다”,
“저곳은 위험하다”는 식으로 귀띔해주었다. 한 마을, 한 가족 안에도 베트남군과 월맹군이 공존하던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준 한진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았던 것이다.
조중훈이 적극적인 난민구제와 대민사업을 펼치면서 베트남 주민들 사이에는 ‘따이한 넘버원’, ‘한진맨 넘버원’이 유행어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가 베트남에서 보여준 현지 직원과 주민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고, 나아가 한진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도 기여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조중훈은 베트남전이라는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베트남 전장을 가까이서 보면 당장 운송과 직결되어 있는 미군밖에 안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현지인들이 보이고 그들의 고통까지 보인다. 멀리서 보면 미군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고충이 있는지까지 헤아리게 된다. 그래서 미군들과 베트남 현지인들의 마음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읽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조중훈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을 경영과 협상의 기본으로 삼았다. 직원의 마음을 헤아리는 리더십, 상대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채워주는 협상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성장의 엔진을 달다
한진의 깔끔한 일처리는 베트남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선박 접안시설이 부족해 늘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퀴논항은 한진의 손길이 닿으면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외항에서 하역을 기다리는 일도 없어졌다. 군수물자는 부지런한 한진 직원들의 손에 의해 신속하게 전선의 각 부대로 전달되었다. 수송을 관리하는 미군들은 엄지를 추켜세웠다.
1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만큼 대우도 1급이었다. 당시 다낭과 사이공 등지에는 한진 외에도 많은 한국 업체가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한진이 받는 용역비는 다른 회사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았다. 최고 수준의 대가를 받으며 많은 물량을 파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수송해내는 한진 때문에 미국 업체들조차 전쟁이 끝날 때까지 퀴논항을 넘보지 못했다. 조중훈은 미군 수송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전장에서 수송은 탄약과 같다. 수송이 잘못되어 배상한다 하더라도 그 돈이 전투 중의 탄약을 대신할 수 없다.”
당시 전투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의미였고, 수송의 막중한 책임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조중훈은 베트남 수송전을 벌이는 내내 그 장교의 말을 곱씹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업체들은 자금난에 허덕여야 했다. 장비 구입 액수가 점점 불어나자 외국 거래선들은 한국 업체들에게 정부의 지불보증을 요구했다. 하루 이틀 단위로 장비와 돈이 돌아야 하는 전쟁 상황에서 절차를 일일이 밟을 여유가 없었다. 조중훈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명의로 된 백지신용장을 받았다. 금액을 64만 달러로 정해놓고 그 액수 안에서 어떤 물건을 구매해도 결제할 수 있는 신용장이었다.
그런데 이 신용장이 문제가 되었다. 홍콩에서 건조하는 바지선이 완성될 즈음 대금을 지불하려고 신용장을 들고 미국 FNCB은행 지금의 씨티은행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한 것이다. 신용장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중훈은 장기영 부총리에게 전보를 쳤다. 당시 부총리는 유럽 출장 중이었다. 다시 독일로 급한 사정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신용장 기간 연장이 안 되면 조선소에 7만 달러를 배상해야 하고 작업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전보가 날아들었다.
조중훈의 신용과 열정을 믿어준 결과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1967년 5월 한진이 미군과 맺은 2차 계약 규모는 1차 계약의 다섯 배에 달하는 3,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한진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반 동안 미군 용역사업으로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도 안 될 때였으니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한진의 베트남 수송사업은 물자 수출보다 부가가치가 더욱 높았다. 정부는 ‘수출의 날’마다 한진에 포상했는데, 한진은 당시 국내 기업 가운데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베트남에서 얻은 금전적인 수입이나 훈장보다 값진 소득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도전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것은 조중훈에게 인생 최대의 보람이었다. 이 자신감이야말로 한진이 베트남사업 이후 종합운송그룹으로 성장해 오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이를 포착하고 실천에 옮기는 결단이 없으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교훈도 확인했다. 그 모든 것의 근간은 평소 쌓은 신용과 신뢰였다.
한진의 베트남사업은 조중훈이란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사업을 발판으로 한진은 계열 회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은 대부분 성장 기반을 국내에 두고 있었다. 한진은 해외에서 거둔 성공을 기반으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조중훈에게 신용은 평소에 쌓는 것이었다. 사업 초기부터 신용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처음에 얻지 못한 신용을 나중에 얻기는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 보급물자 수송권을 따낸 것도 시험적인 대리수송을 할 기회를 만들어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 신용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베트남에서 미군 군수품 수송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나 위기상황에서 거액의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철저하게 신용을 지켰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중훈이 평소에 쌓아둔 신용은 이후 놀라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조중훈이 미군 수뇌부로부터 어느 정도로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베트남전이 끝나갈 무렵, 조중훈과 친분이 있던 미 육군 소장이 일본 주둔지에서 퇴역식을 거행했다. 조중훈도 행사에 초청되었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행사장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퇴역식이 시작되려는 순간, 장군은 조중훈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받고 행사 시작을 잠시 미루었다. 조중훈이 황급하게 장내에 들어선 후에야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터졌다.
베트남에서 성과를 거두고 도약의 기회를 얻은 조중훈은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갈 사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송을 통해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수송보국 輸送報國’의 창업정신에 입각해 탄생한 사훈은 다음과 같다.
「創意와 信念」
「誠意와 實踐」
「責任과 奉仕」
여섯 단어, 세 묶음으로 이루어진 사훈은 조중훈의 창업정신과 경영철학이 응축된, 한진호의 엔진이자 방향키 같은 것이었다. ‘창의 創意’는 남이 닦아놓은 길에는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예술가적 자긍심을, ‘신념 信念’은 한번 시작한 사업 작품은 끝을 볼 때까지 완성하겠다는 장인정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의 誠意’는 수송사업의 필수불가결한 가치인 안전과 고객만족을 위한 신용과 서비스정신을, ‘실천 實踐’은 지식과 생각을 행동과 성과로 이끌어내는 도전정신을 담고 있었다. ‘책임 責任’은 돈만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활동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하는 사업보국, 수송보국의 의지를, ‘봉사 奉仕’는 기업과 기업가는 경제 외적인 부문에서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야 함을 반영하는 가치였다.
사훈을 3단계로 보면 ‘창의와 신념’으로 사업을 일으키고, ‘성의와 실천’으로 사업을 발전시키며, ‘책임과 봉사’로 사업의 성과를 나누고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담고 있다.
조중훈이 사업을 예술로 정의하고 수송외길을 고집한 것, 신용을 절대가치로 여기고 고객관리를 하며 척박한 환경을 뚫고 땅길, 바닷길, 하늘길을 개척해온 것, 이윤과 무관한 교육과 외교 현장에서 어느 기업가보다 헌신적으로 활약한 것 모두 그가 금과옥조로 삼은 여섯 단어의 사훈에서 그 DNA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