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모험
한진상사가 국제화의 선두주자로 베트남에서 외화 획득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던 1960년대 말, 우리 경제도 1, 2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힘입어 서서히 성장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중견기업에서 자본금 1,000억 원대 기업으로 발돋움한 한진도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67년 7월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인수했다. 이듬해 3월에는 이병철 삼성 회장과 조홍제 효성 회장이 공동 소유하고 있던 서울 남대문로 2가 부지를 사들여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조중훈의 다음 계획은 신수종 新樹種사업을 정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성공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조중훈은 당시 해운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다. 해상운송으로 미국이나 유럽과 대규모 무역을 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운업에 진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컨테이너 전용 민자부두를 착공하고 30억 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주도면밀하게 해운업 진출 계획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던 중 조중훈은 정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중훈에게 여권의 재정통이었던 김성곤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을 차례로 보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의사를 전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20여 개의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는 골칫덩이였다. 기체 고장 등으로 툭하면 결항과 연발착이 발생해 공신력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정부가 항공공사를 설립한 것은 1962년이었다. 해방 후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가 도산 지경에 이르자 정부는 당시 영세한 민간자본으로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항공사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국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정부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경영이 힘들어졌다.
1960년대 말, 정부는 연평균 12퍼센트에 달하는 경제성장률과 민간자본의 성장에 힘입어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관료주의에 젖어 경영효율이 떨어지고 있는 국영기업들을 민간에 불하하기로 한 것이다. 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 항공사 중 꼴찌였다. 보유항공기는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에 제트기 1대가 고작이었다. 8대를 다 합쳐봐야 400석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FC-27 2대는 그나마 임차였고, 1934년에 제작된 DC-3 2대는 수명이 다 되었다. 1946년 제작된 DC-4는 고장이 잦아 하늘에 떠 있는 시간보다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DC-9 쌍발제트기 1대만 그런대로 쓸 만했다. 누적적자는 차치하고 국내외 은행에서 빌린 27억 원이 넘는 빚을 갚을 길도 막막했다.
정부는 항공공사의 민영화 방침을 세우고 내로라하는 기업들에게 인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인수 후 막대한 추가 자본 투자가 필요한데도 장래는 불투명하고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독일, 일본 등 한국보다 경제력이 훨씬 앞선 나라들도 항공사는 반관반민 半官半民 형태나 정부 주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민간에서 항공업을 하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인수를 제안받은 기업들은 항공업에 투입할 돈이 있으면 차라리 다른 사업을 하겠다며 항공공사는 정부가 그대로 운영하는 게 좋겠다고 발뺌했다.
차선책으로 추진한 외국 항공사와의 합작안도 수포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에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던 해운공사나 대한통운을 둘러싸고 기업 간 치열한 인수전이 벌어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항공공사 공개입찰에는 어느 기업도 응찰하지 않아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항공업은 조중훈이 운송업에 뛰어들면서부터 관심을 둔 사업이기는 했다. 1960년에 이미 세스나 비행기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고 5.16으로 중도하차하긴 했지만 한국항공주식회사 에어코리아를 설립하기도 했었다. 항공공사 민영화를 놓고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시기에도 조중훈은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90인승 중형항공기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를 운항했다.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90인승 중형항공기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 한 대를 사들였다. 항공공사가 적자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주2회 운항하던 서울-타이베이-홍콩 노선을 휴항하고 있어 서울과 베트남을 오가는 자체 인력의 이동에 불편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실덩어리 항공공사를 인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부의 요청을 세 번이나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다. 조중훈은 항공업에 뛰어들 것이라면 항공공사처럼 부실한 공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을 가지고 항공사를 설립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업보국 차원에서 공기업을 인수해야 한다면 항공공사가 아니라 해운공사가 제격이었다.
그만큼 거절했으면 정부도 포기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국력이 뻗치는 것이라고 여겼던 대통령은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게 소망”이라며 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대통령은 당시 외교에 큰 비중을 두어 한 해 두 차례 정도 해외순방을 하고 있었다.
조중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해운에 관심이 많았다며 해운공사라면 맡아보겠다고 어렵게 말했다. 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해운공사는 이미 맡겠다고 한 사람이 있으니 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조중훈은 국적기를 타고 세계 각국으로 가보고 싶다는 대통령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회사로 돌아온 조중훈은 임원들을 불러 청와대에 다녀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중역들의 반대는 예상보다 거셌다. “누적적자가 27억 원인 회사를 인수해선 절대 안 된다.”, “베트남에서 고생해 모은 돈을 밑 빠진 독에 쏟아 부을 순 없다.”, “다른 조건을 내걸더라도 항공공사 인수만은 거절해야 한다”, “가망도 없는 항공사를 맡을 이유가 없다”고 앞다퉈 말했다. 누군가는 “지금의 자금동원력이면 차관을 얼마든지 들여올 수 있다”며 “차라리 중화학공장을 짓는 게 낫다”고 했다.
조중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그랬다. 직원들 말대로 적자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했다가 생사를 넘나들며 어렵게 키운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조중훈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오너라고 해도 고락을 함께한 임원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심을 담은 설득이 필요했다. 그런 공감이 있어야 항공업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진국에서 항공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더구나 빚투성이 항공사를 인수하는 게 무모한 모험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건너야 할 강인데, 빠져 죽을지 모른다고 건너지 않는다면 선 자리에서 그냥 죽고 말 것이다. 결과만 예측하고 시작하는 사업, 이익만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사업이 아니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는가.”
조중훈의 간곡한 설득에 임원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성공한 도전 치고 무모하지 않은 도전이 있었던가.
감원은 없다
1968년 11월 1일, 조중훈은 정부에 항공공사 인수 의사를 공식 통보했다. 그날은 한진상사 창립 23주년 기념일이었다. 납입자본금 15억 원을 5년 거치 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고 27억 원이 넘는 부채를 그대로 떠안는 조건이었다. 부실회사를 인수하는 조건으로는 턱없이 불리했다.
1969년 3월 1일 대한항공이 출범했다. 오늘날 항공화물수송 세계 3위, 항공여객수송 세계 12위 항공사로 우뚝 선 칼 KAL의 무모할 만큼 험난한 첫 출발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인수를 하고 보니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조중훈은 인수 초기에 회사를 정상화할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항공공사에는 실무급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많았다. 일하는 직원은 적은 반면 명령권자가 넘쳐나는 전형적인 역피라미드 관료조직이었다. 항공기가 고작 8대인 회사에 직원은 790명이 넘었고, 이런저런 인맥으로 채용된 직원이 반 이상이었다. 심지어 이름만 걸어놓고 출근도장만 찍는 유령 직원까지 있었다. 민영화 이후 항공공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감원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사책임자는 부적격자를 해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중훈은 감원이 능사가 아니라며 한 사람도 자르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주인이 바뀌면서 불안감에 휩싸인 직원들에게 공개석상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감원은 절대 없음을 강조했다.
인재는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조중훈의 생각이었다. 사람은 저마다 제 몫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면 자리를 바꿔주거나 교육하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결과 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감축된 인원은 스스로 물러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조중훈은 한진 직원의 60퍼센트에 불과했던 항공공사 직원의 임금을 올려 급여를 상향평준화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성과급 제도도 도입했다. 일정 승객 이상을 수송하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1973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직원자녀학자금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직원 자녀의 대학등록금까지 전액 지원하는 파격적인 복지제도였다. 집안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조중훈이었다.
조중훈은 고용안정이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기를 끌어올릴 것으로 확신했다. 기업은 사람이 만들고 조직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위치가 있는 법이며 그것을 알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조중훈은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자리를 만들어 필요한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적재적소에 배치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누구나 인재가 될 수 있고 인재가 되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중훈의 인재론이다. 이러한 인재론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있다. 직원복지에 관심을 쏟은 것도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중훈은 항공공사 구성원들에 대한 인화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교육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항공사는 전문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사소한 항공용어에서부터 항공요금 계산법, 조종사들이 사용하는 통신망인 텔렉스 이용법까지 모든 업무에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문제는 실무진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공유하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외국 항공사에서 어렵게 구해온 자료와 매뉴얼을 각자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었다. 비법을 알려주었다가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내교육 강사들조차도 강의만 하고 문서로 된 교재를 만들지 않았다. 고민 끝에 강사들의 강연 내용을 녹음해 교재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입사원이 들어와 제대로 업무를 익히기까지 4~5년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직원들은 고졸 직원보다 월급은 많았지만, 아는 것은 오히려 적었다.
조중훈은 고민 끝에 복안을 내놓았다. 자료 공개를 독려하기 위해 포상금을 건 것이다. 자료의 내용에 따라 등급을 매겨 포상금을 지급했는데, 1급 자료일 경우에는 상금이 한 달 봉급을 훌쩍 넘었다. 또 처음으로 사내교육원을 설립하고, 각 업무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직원들을 교육원 강사로 발령했다. 강사로 차출된 직원에 대해서는 2~3년간 교육원에서 일하면서 교재를 잘 만들면 원하는 나라로 파견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만에 비로소 대한항공의 사내 교재가 편찬되었다. 여객영업, 화물영업, 운송기본 등으로 분야를 나눠 초.중.고급 단계별로 작성된 짜임새 있는 교재였다. 당시 만들어진 《항공약어집》은 지금도 대한항공 교본의 토대로 활용되고 있다.
머릿속에 있거나 데이터화되지 않은 지식을 문서로 체계화해 모든 직원이 공유하게 한 것은 국내 기업 중 최초의 시도였다. 조중훈은 그것을 ‘지식투자’라고 표현했다. 요즘 경영학 개념으로 지식경영 시스템 구축이었다. 조중훈은 구성원 사이의 지식, 기술, 정보, 경험의 공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지식경영에서 지식공유에 적합한 조직체계와 관리방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조중훈은 이미 오래 전 그것을 적용했던 것이다. 지식은 나누면 커진다는 것을 조중훈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본, 기술, 직원.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고르라면 틀림없이 조중훈은 직원을 택했을 것이다. 직원을 교육하면 얼마든지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기술을 통해 얼마든지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기업의 역할이 사업 자체만이 아니라 핵심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 포함해야 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더 크게 더 높이 더 멀리
조중훈은 대한항공의 내부 틀을 잡아나가는 동시에 과감한 투자에 착수했다. 기종을 늘리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 좋은 4발 제트기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당시 선진 외국항공사들은 대형 제트기를 띄우며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생 대한항공이 살아남으려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단기간에 최대 수송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조중훈은 2년 만에 국내선용으로 신형 YS-11 8대를 들여왔다. 동시에 국제선 진출에 대비해 중.장거리용 항공기 도입을 서둘렀다.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대한항공이 국영에서 민영으로 바뀐 효과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감한 항공기 도입이었다. 공사 시절에는 도입할 항공기 기종을 두고 일 년이 넘도록 검토만 하고 있었다. 더글라스냐 보잉이냐를 놓고 사장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결재란에 사인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조중훈이 항공공사를 인수하고 나서 그런 문제는 일거에 해소되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항공사업의 경쟁력만 보고 과감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중훈은 항공을 멋지게 하고 싶었다. 민영 대한항공을 이륙시키면서 사업가가 아니라 예술가처럼, 사장이 아니라 화가처럼 노선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항공기 도입을 결정한 다음 조중훈은 국제선 항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외화를 벌어들여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항공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국제선 노선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향후 10년, 20년, 50년을 내다보고 대한항공이 취항할 노선을 그렸다. 그는 서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두고 미주 노선과 유럽 노선의 거점을 잡았다.
오늘날 대한항공이 개척해 운항하는 그물망 같은 노선도를 보면 40여 년 전 조중훈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선견지명을 가지고 밑그림을 그렸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항공 노선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그림이며 예술작품이다.
밑그림을 제대로 그렸다고는 해도 신생 항공사가 항로를 개척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항로는 비행기와 수요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라 하늘길이라 해도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빼앗기거나 국가간 외교문제 때문에 막히는 일이 허다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놓고 하늘은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있었다.
1969년 당시 대한항공이 그나마 외화를 벌어들이는 국제선은 서울-도쿄, 서울-오사카, 부산-후쿠오카 노선이 고작이었다. 미주노선은 국적 항공사가 있다는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꼭 취항해야 했지만 당시 한미항공협정에 따라 한국 항공사에는 알래스카를 경유해 시애틀까지
가는 북태평양 노선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한국 승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호놀룰루나 로스앤젤레스 등 중부태평양 노선에는 운항이 허락되지 않았다. 중동으로 가는 발판이 될 서울-방콕 노선이나 동남아 진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서울-마닐라 노선, 서울-사이공 노선도 취항이 안 되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1969년 10월, 조중훈은 일단 서울-사이공 노선에 B720 여객기를 띄웠다. 당시 베트남노선은 파병을 비롯해 한국 건설사와 용역업체들의 진출이 많아 항공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다. 귀국하는 장병이나 기술인력의 수송을 위해 취항을 서둘러야 할 노선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협정을 맺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조중훈은 베트남 정부에 한국의 병력과 근로자 수송을 위해 취항이 불가피함을 설명해 착륙 허가를 받아냈다. 1969년 대한항공 B720 여객기가 사이공에 취항하면서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 노선은 사이공까지 연장되었다. 조중훈은 이 노선을 다시 방콕까지 연결해 동남아 최장 노선 기록을 세웠다. 동남아 노선 확장에 따라 옛 항공공사 시절 운항이 중단되었던 서울-홍콩 직항 노선도 부활시켰다. 동남아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라는 조중훈의 예측은 적중했다. 한국경제의 비약적인 성장 속에 조중훈은 동남아를 발판으로 꾸준히 항로를 늘려나갔고, 대한항공은 국적 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남아 노선을 확장하는 것은 단기적인 목표에 지나지 않았다. 조중훈은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국, 즉 서울을 전 세계 하늘길의 중심으로 만드는 구상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의 규모나 한국의 국가적 위상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이었다. 하지만 조중훈에게는
가능한 도전이었다. 그 도전의 첫발은 서울-도쿄 노선의 이원권 以遠權 확보였다.
일본과의 항공협정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빅딜이었다. 조중훈은 서울-도쿄 노선을 개척하면서 일본 측에 이원권을 요구했다. 즉, 서울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비행기가 도쿄에서 출발하는 승객이나 화물을 싣고 미국 등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물론 일본 항공사가 도쿄에서 서울을 거쳐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권리도 주겠다고 했다. 명목상으로 양자가 서로 이원권을 보장해주는 공평한 협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에게는 이렇다 할 이득이 없고 대한항공만 혜택을 보는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만 해도 도쿄에서 제3국으로 가는 승객이나 화물은 많았지만, 도쿄에서 온 비행기를 서울에서 타고 제3국으로 갈 승객이나 화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일본에게 불리한 이 협상이 이루어진 데는 조중훈 특유의 외교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정.재계 깊숙이 선이 닿아 있었다.
일본과의 항공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낸 조중훈의 다음 목표는 일본 승객을 태우고 서울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조중훈이 이런 얘기를 꺼냈을 때 실무자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누가 들어도 상식에 어긋나는 경로였다. 유럽으로 가는 일본 승객이 무엇 때문에 자국 항공사의 직항노선을 놔두고 외국 항공사인 대한항공을 타고, 그것도 번거롭게 서울을 거쳐 가려고 하겠느냐며 모두 고개를 저었다.
조중훈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생각했다. 모두가 일본 승객을 도쿄 승객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 조중훈은 “일본에서 유럽으로 가는 사람들이 도쿄에만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허를 찌르는 통찰이 아닐 수 없었다. 수도 도쿄만 보지 않고 일본의 지방도시에서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가는 승객을 붙잡겠다는 것이 조중훈의 전략이었다.
열도인 일본은 지방에서 유럽을 가자면 일단 국내선을 타고 도쿄로 올라와야 했다. 조중훈은 바로 그 점을 주목했다. 대한항공이 일본의 주요 지방도시에 취항하면 그 지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서울을 거쳐 유럽으로 갈 승객이 적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 승객들 입장에서는 자국 항공사를 이용해 도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보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대한항공편을 타고 서울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이 거리와 시간, 비용을 모두 줄일 수 있어 수요가 충분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조중훈의 이런 판단은 훗날 동북아-유럽 노선의 중심이 도쿄가 아니라 서울이 된 결정적인 포석이 되었다.
조중훈은 요즘으로 말하면 ‘디테일에 강한’ 경영자였다. 모두가 막연하게 일본을 하나의 열도로 보고 수도인 도쿄에만 집중할 때 그는 일본의 지방 곳곳의 승객 수요까지 꼼꼼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없던 시장을 만들 수도 있음을 조중훈은 간파하고 있었다. 보이는 시장은 경쟁사에게도 보인다. 경영자는 보이지 않는 시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블루오션이든 틈새시장이든 미래의 시장은 지금 보이지 않는 시장이다. 경영자란 모름지기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조중훈은 그런 경영자였다.
하늘길 개척에서 가장 큰 난관은 미주노선이었다. 1957년 4월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항공협정은 한마디로 불평등조약이었다. 한국은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미국의 특정 도시에만 취항할 수 있는 반면에 미국은 어느 도시에서든 출발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권리와 한국을 거쳐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이원권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한미간 조속한 항공기 취항을 위해 불가피하게 맺어놓은 계약이 오히려 대한항공의 미주노선 취항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한항공의 국제선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미항공협정 개정이 시급했다. 그러나 미국은 협상테이블에조차 나오려 하지 않았다.
조중훈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1970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도 영업소를 열었다. 배수진을 쳐놓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조중훈에게 미국 정부는 1971년 결국 중부 태평양노선 취항을 허가하기에 이른다. 대한항공 출범 2년. 마침내 태평양의 하늘길을 뚫은 것이다.
국제선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륙하는 동안 국내선 사업도 체계적인 기틀을 잡아 나갔다. 1969년 서울-포항 노선을 신설하고 1971년 말 국내 15개 도시, 17개 노선을 매일 49회 넘게 왕복운항하는 전국순환노선망을 구축했다. 전국 1시간대 생활권 시대를 연 것이다. 김포공항에 B747 1대 또는 F-27 4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격납고도 준공했다.
시장을 창출하는 조중훈의 혜안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사업철학과 끊임없는 열정의 소산이었다. ‘길을 여는 것이 곧 사업’이라는 철학의 바탕 위에 하늘길, 바닷길, 땅길은 물론 사람간, 나라간 길을 여는 것까지 사업이라는 신념으로 열정을 쏟아 부었다.
태평양을 날다
1971년 1월 미국과의 항공협정을 개정해 미주노선 취항을 인가 받은 조중훈은 4월부터 정기 화물기를 띄우기로 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미주노선은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태평양횡단 노선이었다.
조중훈이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미국의 첫 취항도시로 결정한 것은 지금 와 생각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로스앤젤레스가 장차 급부상할 것을 내다본 것이다. 뉴욕이나 워싱턴에 취항할 경우 미국 항공사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것도 감안한 판단이었다. 태평양노선에 여객기가 아닌 화물기를 먼저 띄운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장은 여객 수요가 없는데다 안전과 서비스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검증할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취항이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우선 전담조직을 구성하려고 보니 항공화물운송에 종사해본 전문가가 없었다. 또 한미간 무역 규모가 크지 않은 시절이어서 취항일정을 정하고 나서도 실어 나를 화물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역들 사이에서 취항을 연기하자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적인 배려도 기대할 수 없었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항공산업을 키우기 위해 국민들이 자국기를 이용하도록 권장하고 보호하고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국적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도 정부 차원의 지원은 전무 하다시피 했다.
조중훈은 고민에 빠졌다. 이륙도 해보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미주노선 개설은 피말리는 협상 끝에 따낸 숙원사업이었다. 화물기를 띄우기로 한 이상 무엇이라도 실어야 했다. 조중훈은 항공화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다. 가발은 부피에 비해 가벼워 화물기로 실어 나르기에 적격이었다. 조중훈은 실무자들에게 가발업체를 찾아 물량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가발업체들은 대부분 중소업체들로 곳곳에 흩어져 있어 소재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영업직원들은 수출조합을 찾아가 가발업체의 주소를 받고, 부동산중개소에서 위치를 물어물어 한 곳 한 곳 찾아다녔다. 어렵사리 수출업체를 찾았다 하더라도 힘겨운 설득전을 벌여야 했다. 가발업체들에게 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고 부탁하고 외국 바이어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가 숙박부를 뒤져가며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주들은 갓 화물노선을 개설한 대한항공에 대한 불신이 컸다. 외국항공사에 맡겨야 안심이 된다며 항공사 교체를 꺼렸다.
어려움 속에서 가까스로 확보한 화물을 실은 대한항공 KE801편 화물기가 1971년 4월 26일 오후 5시 마침내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중간 기착지인 하네다공항에 잠시 착륙했다가 다시 이륙한 화물기는 태평양 상공을 가로질러 12시간 4분 후에 로스앤젤레스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대한항공의 역사적인 태평양 횡단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도쿄를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거리는 1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장거리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미주노선에 진출했지만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 태평양노선의 화물시장은 미국 노스웨스트항공과 플라잉타이거항공, 일본항공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미노선의 경우 미국 양사가 B707과 DC-8 화물전용기를 운용하며 화물시장을 양분하고 있었고, 미일노선만 운영하던 일본항공도 1970년부터 한일노선에 화물기를 띄우며 미국의 두 항공사를 추격했다.
적자가 났지만 예상했던 것이었다. 조중훈은 공격적인 판촉에 나섰다. 대한항공에 관심을 보이는 화주들이 늘어나고, 운항 횟수가 쌓이면서 신뢰도 두터워졌다. 해외에서도 칼 KAL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대한항공의 시장점유율은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주노선을 개설한 지 1년이 지난 1972년 4월 조중훈은 도쿄를 경유하는 미주노선 화물편을 주3회에서 2회로 줄이는 대신 서울-로스앤젤레스 화물 직항 4편을 신설하는 증편을 단행했다. 조중훈이 예상했던 대로 화물 수요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대한항공은 항공화물 운송사업을 진행하면서 특수화물 분야에서 몇 가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2년 일본 도쿄에서 쿠웨이트로 77톤에 달하는 송유관 33개를 한번에 수송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항공과 플라잉타이거 등 대형 항공사들도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작업이었다. 1983년에는 미국 댈러스에서 서울까지 살아있는 동물 418마리를 수송하기도 했다. 서울대공원에 수용될 동물이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며 대서특필했다. 가발로 시작된 화물은 오늘날 반도체와 휴대전화로 바뀌었고, 대한항공은 화물운송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도약했다.
미주노선에 화물기를 성공적으로 취항시킨 조중훈은 경험을 축적하며 여객기 운항을 준비했다. 1972년 4월 19일 오후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은 태평양 횡단의 첫 임무를 띤 대한항공 KE002편 B707 여객기가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교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조중훈은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교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제의 강압에 못 견뎌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단한 삶을 견뎌온 동포들에게 태극마크가 새겨진 국적기는 국력의 표상이자 그들의 자랑이었다.
조중훈은 악수를 나누기 위해 교민들에게 다가섰다.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도 있었고, 당장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조중훈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와이 동포들의 열광적인 환영 장면을 조중훈은 평생 잊지 못했다. 목적지인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감격에 젖어 있는 교민들은 조중훈에게 국적기 사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항공은 해외동포들에게 조국애를 불러일으키는 국가적 대업이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대한항공의 태평양 횡단은 이후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미국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 것과 함께 미국
교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적자투성이였던 항공공사를 인수했을 때 조중훈은 기업가로서의 소명의식과 국가에 대한 봉사를 생각했다. 장삿속을 챙겼다면 회생이 불투명한 항공사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조중훈은 국적기 사업을 국익과 공익의 차원에서 이끌어야 할 소명으로 여겼고, 미국에서 교민들을 보면서 그 소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대한항공이 미주에 여객기를 띄운 뒤 재미동포들 사이에는 “칼 KAL 타고 왔수다”라는 유행어가 생겼을 정도다. 당시 한 언론사 주미특파원이 이 유행어를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대한항공이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세계 항공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자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쾌거였다. 태평양을 유유히 건너간 KAL기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사업의 꽃을 피운 조중훈이 상처 입은 한민족의 가슴에 날려 보낸 파랑새 같았다. 화물노선과 달리 여객노선은 취항 초기부터 탑승률이 예상보다 높았다. 조중훈은 취항 석 달이 지난 7월 도쿄를 거치지 않고 서울-호놀룰루-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하는 직항노선을 개설하고, 10월에 다시 주 1회를 증편했다.
점보기를 띄운 승부수
대한항공이 잇달아 국제선을 개설하면서 세계적인 항공사로 발돋움할 무렵, 세계 항공업계는 대형기를 이용한 대량수송체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바로 ‘하늘의 궁전’으로 불리는 B747 점보기의 등장이다. 1966년 3월 보잉이 B747 제작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의 팬암항공은 한꺼번에 25대 5억2,500만 달러 규모를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팬암항공의 결정은 세계 항공업계에 B747붐을 일으켜 그해 연말까지 무려 열두 개 항공사가 보잉에 총 138대를 발주했다.
B747 1호기가 완성된 것은 1968년 9월이었다. B747에 붙어 다니는 애칭인 ‘점보’는 본래 런던동물원에 있던 몸집이 큰 코끼리의 이름이었다. 이후 덩치 큰 동물의 대명사가 되었고, B747이 처음 등장했을 때 유난히 큰 동체를 보고 미국 기자들이 ‘점보기’라는 애칭을 붙인 것이다.
조중훈도 B747 도입을 추진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한 이듬해인 1970년 5월 ‘B747 도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타당성을 검토했다. 위원회는 B747의 특성과 제원, 다른 항공사의 운영 실적, 사업성과 경제성, 자금 조달 방안과 상환 능력 등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보잉과 점보기 2대를 구입하는 가계약을 체결했다.
팬암항공을 시작으로 B747 취항 경쟁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진 항공사에 국한된 것이었다. 아시아 하위권 항공사로 치부되었던 대한항공이 가계약을 체결하자 세계 항공업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계약단계에서 구입을 포기하거나 유보할 것이라고 점쳤다. 그러나 조중훈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항공공사를 인수할 당시부터 3년 안에 B747 날개에 태극마크를 그려 넣겠다고 다짐했었다.
총 450만 개의 각종 정밀 부품으로 이루어진 B747은 당대 최첨단 항공기 제작 기술이 집약된 전대미문의 거구였다. 기체 높이가 19.3미터로 6층 건물과 맞먹었고, 길이는 70미터, 전폭은 60미터에 달했다. 하늘을 나는 궁전이라 불릴 만했다.
B747은 외형만큼이나 성능도 압도적이었다. 당시 국제선 주력 기종이던 B707의 2.5배에 이르는 최대 50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고, 25톤의 화물을 따로 탑재할 수 있었다. B747의 속도는 시속 625마일 마하 0.8로 B707보다 50마일이나 빨랐다. 내비게이션의 항로 오차범위를 10마일에서 1마일로 단축한 관성항법장치 INS를 장착하고 있어 항법사 없이도 안전운항이 가능했다. 아폴로우주계획에서 처음 적용된 이 장치는 지상지원 장비 없이도 항공기의 고도와 속도, 방향을 정확히 계산해낸다. 또 자동조종장치는 항공기의 속도와 수평비행, 고도변경 등을 자동적으로 수행해 조종사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조중훈은 또다시 반대에 부닥쳤다. 자금 부담이 만만치 않고, 점보기를 운용할 기술과 여객 수요 확보도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구입비용은 두 대에 7,000만 달러에 달했다. 그 돈이면 당시 세계 최대의 화학비료공장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중훈에게 점보기 도입은 대한항공의 사활을 좌우할 중요한 선택이었다. 조중훈은 결국 1972년 9월 5일 점보기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점보기에 태울 만큼 많은 승객이 없는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점보기를 들여오는 것 자체가 무모해보였다. 하지만 조중훈의 생각은 달랐다. 승객이 없어서 점보기를 띄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보기가 없어서 대규모 승객을 태울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점보기는 그 옛날 조중훈이 상하이의 유대인 카페에서 목도한 케이크 같은 것이었다. 눈에 보이면 손님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손님이 없는 그 이상한 케이크.
대부분 항공사가 그랬듯이 대한항공도 막대한 구입자금을 차관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한항공의 대외 신용은 이러한 차관을 끌어들이기에는 미흡했다. 조중훈의 신용과 보증에 의존해야 했다. 점보기 도입 자금을 확보하고도 조중훈은 애를 먹어야 했다. 당시 일본에 파견되어 있던 보잉의 마케팅 직원은 대한항공의 구매 제안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라고 해도 오지 않다가 계약금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조중훈을 찾아왔다. 보잉 직원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한국 항공사에게 점보기는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중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금으로 구매하겠다고 한 끝에야 계약이 이루어졌다.
10년 후 조중훈은 다시 보잉으로부터 점보기 10대를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보잉에게는 어마어마한 고객이 된 것이다. 당시 보잉 사장은 조중훈을 시애틀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고객사 회장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는 보잉 회장도 참석했다. 파티가 무르익어갈 무렵 조중훈은 보잉 회장에게 웃으며 10년 전 처음 점보기를 구입할 때 있었던 얘기를 꺼냈다. 회장은 낯이 뜨거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1973년 5월 2일 대한항공이 도입한 B747 1번기가 미국 시애틀공항을 출발한 지 11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포공항은 점보기 도입을 앞두고 활주로를 확장해놓고 있었다. 공항 상공에 이르러 한국 최초의 점보기 착륙을 기내방송으로 알리자 보잉 중역들과 미국 기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조중훈은 2주가 지난 1973년 5월 16일 이 비행기를 태평양노선에 투입했다. 이날 김포공항에서는 점보기의 미주노선 정식 취항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요인과 주한외교사절, 각계 대표와 그룹사 대표 등 800여 명이 참석했다. 당시로서는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공군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면서 비둘기 수백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자 행사는 절정에 달했다. 단상에 오른 조중훈이 말했다.
“점보기 취항은 번영된 내일을 향한 국민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우리 기업의 사명감을 고취시켜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중훈은 임직원 아내들을 기념식에 초청해 행사 직후 B747 내부를 두루 관람시켰다. 대한항공 가족들에게 긍지와 사명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였다. 1번기는 이날 오후 7시에 각계 인사와 언론인 등 100여 명을 태우고 미국행 장도에 올랐다.
조중훈은 그해 7월 B747 2번기를 인수해 역시 태평양노선에 추가로 투입했다. 이듬해인 1974년 9월에는 세계 최초로 점보기를 화물노선에도 투입했다. 세계 최대 항공화물시장인 태평양노선이었다. 당시 조중훈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일본항공의 한 고위 중역은 회사의 체면이 걸린 일이니 대한항공 점보 화물기 취항을 한 달만 늦춰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계 항공업계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중훈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우정은 우정이고 사업은 사업이었다.
잇단 점보기 도입은 적지 않은 재정부담이 되었지만, ‘약소국의 신생 항공사’라는 대한항공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세계 유수 항공사들도 석유파동과 수요 감소로 점보기 운영을 꺼리고 있었다. 조중훈은 “도전 없이는 발전도 없다”며 밀어붙였고, 이후 점보기는 대한항공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IBM의 까다로운 고객
조중훈은 항공공사를 인수한 직후부터 업무전산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기종 선정을 비롯한 전산정책을 협의하기 위해 ‘컴퓨터 도입 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전산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한국IBM에 위탁해 대한항공 직원들에게 컴퓨터교육도 실시했다. 조중훈 자신도 컴퓨터공부에 열중했다. 당시 일본에서 IBM이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에 필요한 전산화 개념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조중훈도 일본에 머물며 그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조중훈이 전산화 시스템 구축에 일찍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70년 초 어느 늦은 저녁, 조중훈은 남대문로 2가 대한항공 신사옥에 들렀다가 사무실 한 곳에 불이 환하게 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시각까지 할 일이 그렇게 많은가?”
그러자 책임자가 대답했다.
“수만 장이 넘는 탑승권 전표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집계하느라 손이
모자랍니다. 앞으로 승객과 화물이 더 늘어날 텐데 걱정입니다.”
조중훈은 안쓰러운 표정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 후 1년. 대한항공에 처음 컴퓨터가 도입되었다. 기종은 IBM 1130으로 용량은 16킬로바이트에 불과했다. 대한항공은 이 컴퓨터를 가지고 국내선 여객운송 수입관리 업무를 전산화했다. 당시 영업 규모로 보면 국내선 여객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지만 국제선에 비해 덜 복잡했기 때문에 초기 개발 대상으로 적합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조중훈은 곧 국제선 여객운송 수입관리 전산화에 착수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에 대한 직원들의 호응도가 높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전산 담당자는 컴퓨터의 효용성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 직원들이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기존 수작업에 비해 업무 처리가 오히려 늦어지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 때문에 화물운송 수입관리 시스템을 개발해놓고도 실제 업무에 적용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1973년에 이르러 국제선 비중이 커지면서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처하기 위한 여객 서비스 개발이 필요했다. 특히 국제선 여객 예약 업무의 전산화는 시급했다. 조중훈은 이를 위해 30여 명으로 개발팀을 구성하고 10개월 동안 국내외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당시 선진 항공사들이 주로 사용하던 IBM의 국제항공예약시스템 IPARS을 도입해 국제선 예약 시스템인 ‘KAL COS-1’을 가동했다. 이후 시스템을 계속 보완하면서 해외 지점으로 확장해 1977년 말에는 대한항공 예약망의 90퍼센트 정도를 전산화했다. 전산 요원의 전문화와 전산업무 표준화를 위해 모든 부서에 전산 담당자도 배치했다.
조중훈의 이런 선구적인 투자 덕분에 대한항공은 선진 전산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한항공은 요구 수준이 너무 높아 전산시스템 구축에 참여한 IBM에게도 쉽지 않은 고객사였다. 대한항공에 파견된 IBM 직원 대부분이 당시 다른 고객사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까다로웠던 전산시스템 구축 경험을 인정받아 이후 고위직으로 승진했을 정도다. IBM 직원들에게 대한항공은 고난도 전산시스템을 실습하는 사관학교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대한항공이 자체 전산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장기적으로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이후 한국에 진출한 외국 항공사들은 공항에 자사 예약시스템을 운용하려고 했다가 자사보다 발달된 대한항공 예약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비행기는 인류가 공간의 장벽을 극복하게 했고, 컴퓨터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했다. 비행기와 컴퓨터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조중훈은 그것을 내다보고 시작부터 항공 전산화에 공을 들였다. 오늘날 대한항공이 세계의 날개로 비상하고 항공의 생명인 안전성을 확보한 데는 전산화의 힘이 지대했다. 조중훈은 컴퓨터를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프로그램이나 전산시스템을 만드는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업에 필요한 정보와 데이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항공이 업무 전산화와 표준화를 위해 전산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 窮卽通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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