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을 열다

일생일대의 모험

한진상사가 국제화의 선두주자로 베트남에서 외화 획득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던 1960년대 말, 우리 경제도 1, 2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힘입어 서서히 성장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중견기업에서 자본금 1,000억 원대 기업으로 발돋움한 한진도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67년 7월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인수했다. 이듬해 3월에는 이병철 삼성 회장과 조홍제 효성 회장이 공동 소유하고 있던 서울 남대문로 2가 부지를 사들여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조중훈의 다음 계획은 신수종 新樹種사업을 정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성공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조중훈은 당시 해운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다. 해상운송으로 미국이나 유럽과 대규모 무역을 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운업에 진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컨테이너 전용 민자부두를 착공하고 30억 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주도면밀하게 해운업 진출 계획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던 중 조중훈은 정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중훈에게 여권의 재정통이었던 김성곤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을 차례로 보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의사를 전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20여 개의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는 골칫덩이였다. 기체 고장 등으로 툭하면 결항과 연발착이 발생해 공신력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정부가 항공공사를 설립한 것은 1962년이었다. 해방 후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가 도산 지경에 이르자 정부는 당시 영세한 민간자본으로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항공사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국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정부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경영이 힘들어졌다.

1960년대 말, 정부는 연평균 12퍼센트에 달하는 경제성장률과 민간자본의 성장에 힘입어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관료주의에 젖어 경영효율이 떨어지고 있는 국영기업들을 민간에 불하하기로 한 것이다. 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 항공사 중 꼴찌였다. 보유항공기는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에 제트기 1대가 고작이었다. 8대를 다 합쳐봐야 400석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FC-27 2대는 그나마 임차였고, 1934년에 제작된 DC-3 2대는 수명이 다 되었다. 1946년 제작된 DC-4는 고장이 잦아 하늘에 떠 있는 시간보다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DC-9 쌍발제트기 1대만 그런대로 쓸 만했다. 누적적자는 차치하고 국내외 은행에서 빌린 27억 원이 넘는 빚을 갚을 길도 막막했다.

정부는 항공공사의 민영화 방침을 세우고 내로라하는 기업들에게 인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인수 후 막대한 추가 자본 투자가 필요한데도 장래는 불투명하고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독일, 일본 등 한국보다 경제력이 훨씬 앞선 나라들도 항공사는 반관반민 半官半民 형태나 정부 주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민간에서 항공업을 하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인수를 제안받은 기업들은 항공업에 투입할 돈이 있으면 차라리 다른 사업을 하겠다며 항공공사는 정부가 그대로 운영하는 게 좋겠다고 발뺌했다.

차선책으로 추진한 외국 항공사와의 합작안도 수포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에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던 해운공사나 대한통운을 둘러싸고 기업 간 치열한 인수전이 벌어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항공공사 공개입찰에는 어느 기업도 응찰하지 않아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항공업은 조중훈이 운송업에 뛰어들면서부터 관심을 둔 사업이기는 했다. 1960년에 이미 세스나 비행기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고 5.16으로 중도하차하긴 했지만 한국항공주식회사 에어코리아를 설립하기도 했었다. 항공공사 민영화를 놓고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시기에도 조중훈은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90인승 중형항공기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를 운항했다.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90인승 중형항공기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 한 대를 사들였다. 항공공사가 적자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주2회 운항하던 서울-타이베이-홍콩 노선을 휴항하고 있어 서울과 베트남을 오가는 자체 인력의 이동에 불편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실덩어리 항공공사를 인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부의 요청을 세 번이나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다. 조중훈은 항공업에 뛰어들 것이라면 항공공사처럼 부실한 공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을 가지고 항공사를 설립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업보국 차원에서 공기업을 인수해야 한다면 항공공사가 아니라 해운공사가 제격이었다.

그만큼 거절했으면 정부도 포기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국력이 뻗치는 것이라고 여겼던 대통령은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게 소망”이라며 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대통령은 당시 외교에 큰 비중을 두어 한 해 두 차례 정도 해외순방을 하고 있었다.

조중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해운에 관심이 많았다며 해운공사라면 맡아보겠다고 어렵게 말했다. 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해운공사는 이미 맡겠다고 한 사람이 있으니 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조중훈은 국적기를 타고 세계 각국으로 가보고 싶다는 대통령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회사로 돌아온 조중훈은 임원들을 불러 청와대에 다녀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중역들의 반대는 예상보다 거셌다. “누적적자가 27억 원인 회사를 인수해선 절대 안 된다.”, “베트남에서 고생해 모은 돈을 밑 빠진 독에 쏟아 부을 순 없다.”, “다른 조건을 내걸더라도 항공공사 인수만은 거절해야 한다”, “가망도 없는 항공사를 맡을 이유가 없다”고 앞다퉈 말했다. 누군가는 “지금의 자금동원력이면 차관을 얼마든지 들여올 수 있다”며 “차라리 중화학공장을 짓는 게 낫다”고 했다.

조중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그랬다. 직원들 말대로 적자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했다가 생사를 넘나들며 어렵게 키운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조중훈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오너라고 해도 고락을 함께한 임원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심을 담은 설득이 필요했다. 그런 공감이 있어야 항공업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진국에서 항공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더구나 빚투성이 항공사를 인수하는 게 무모한 모험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건너야 할 강인데, 빠져 죽을지 모른다고 건너지 않는다면 선 자리에서 그냥 죽고 말 것이다. 결과만 예측하고 시작하는 사업, 이익만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사업이 아니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는가.”

조중훈의 간곡한 설득에 임원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성공한 도전 치고 무모하지 않은 도전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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