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날개에서 세계의 날개

에어버스로 유럽 하늘을 열다

대한항공의 점보기가 태평양을 날아다니게 되자 조중훈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1971년 초 일찌감치 조사단을 꾸려 유럽시장을 파악해두고 그해 말에는 파리에 영업소도 설치했다. 유럽노선을 뚫기 위한 전초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 각국은 자국기를 애용하면서도 항공사들은 미국 항공사들과 대적하기 위해 범유럽의 기치 아래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시장에 극동의 신생 항공사가 노선을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까다로운 유럽시장에 단독으로 뛰어드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에어프랑스와 손잡고 파리 취항을 추진했다.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71년 가을, 조중훈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로부터 긴급한 요청을 받았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는 것이었다. ‘에어버스’라는 말에 조중훈은 할 말을 잃었다. 에어버스는 유럽의 신생 항공기 제작사로 항공기를 갓 생산한 상태였다. 성능과 안전 테스트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해 세계 어느 노선에도 투입되지 못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드골 정부는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으로 도약시킨다는 비전을 세우고 미국에 맞설 항공산업을 키우는 데 박차를 가했다. 에어버스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구심점으로 설립되었는데, 항공기 개발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영국, 독일, 스페인이 지분참여를 했다. 그 에어버스가 한국 정부에 항공기를 사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심각한 외교문제가 걸려 있었다. 당시 북한은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 WHO 단독가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옛 프랑스령 나라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를 통해 그들 나라의 표를 얻어 WHO에 가입한다는 계산이었다.

북한은 프랑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조건으로 프랑스로부터 2억 달러에 달하는 건설장비를 구매해 주었고, 그 결과 북한의 WHO 단독가입이 유력해졌다. 이것은 국제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당시의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한국 정부에 적잖은 위협이 되었다. 프랑스가 한국을 배제하고 북한과 손잡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 정부가 도시지하철 사업을 추진하면서 프랑스에 기술용역을 주기로 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판에 일본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외교단절을 운운할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갈등을 풀기 위해 김종필 총리가 프랑스 정부에 접촉을 시도했는데, 프랑스 정부가 관계를 개선하려면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고 한 것이다. 규모는 앞서 북한이 구매한 건설장비 규모에 상응하는 2억 달러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조중훈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는 성능 파악도 안 되어 있는데다 에어프랑스와 루프트한자 외에는 어느 항공사도 주문하지 않고 있었다. 주주국인 영국과 스페인의 항공사들조차 주문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가 외교상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된 조중훈은 정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에어프랑스와 루프트한자에 이어 에어버스의 세 번째 고객이 되었다. 아시아 항공사가, 그것도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대한민국 항공사가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유럽의 신생 항공기 제작사의 비행기를 도입하겠다고 한 것은 프랑스 정부가 화를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감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구매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조중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성능 검증이 되지 않은 항공기를 띄운다는 것은 안전상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계약서에 단서를 달았다.

「계약 후 5년 안에 100대 이상 팔리지 않을 경우, 구매한 항공기를 모두 반납하고 환불받겠음.」

에어버스는 당혹스러웠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에어버스는 큰 문제없이 5년이 되기 전에 200대가 넘게 팔려나갔다. 에어버스가 기대 이상으로 많이 팔려나간 데는 대한항공의 덕도 컸다. 대한항공이 에어버스를 구매하자 다른 나라 항공사들도 하나둘 구매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어버스를 구매하면서 조중훈은 실질적인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항공기가 취항하는 공항마다 본사 정비기술자들을 충분히 배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직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만큼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만전을 기한 것이다.

대한항공이 에어버스를 구매한 것은 한국과 프랑스간 외교마찰을 풀고 유대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의 성장에도 커다란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외교적 문제를 푼 이상 조중훈 입장에서도 에어버스를 구매하는 것이 ‘울며 겨자 먹기’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했다.

조중훈은 에어버스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파리 취항을 내걸었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500명도 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승객이 훨씬 더 많았다.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에어프랑스가 안 될 일이라며 펄쩍 뛰었지만, 조중훈은 에어버스의 고객사임을 강조하며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을 이끌어냈다. 1973년 조중훈이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그해 10월 6일 대한항공은 서울과 파리를 잇는 북극항로를 타고 일본과 미주에 이어 마침내 유럽에 진출하게 되었다.

조중훈은 파리노선에 화물기를 먼저 띄우고 1년 후 여객기를 띄웠다. 미주노선을 개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화물기 운영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하고 시장상황을 충분히 파악한 것이다. 그는 노선을 개척할 때마다 이 원칙을 지켰다. 다른 항공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유럽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리면서 대한항공은 세계일주 노선망 구축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유럽의 관문이자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인 파리에 취항하면서 동북아발 유럽행 항공 수요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 내 다양한 주요 목적지로 이동하는 승객에게 커다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나아가 한국과 유럽 간 교역과 문화 교류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파리의 지정학적 의미를 고려한 조중훈의 유럽노선 개척은 오늘날 대한항공이 유럽노선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단초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파리를 유럽노선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독일보다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십분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서울-파리 노선은 개척할 때부터 대한항공에 유리한 것이었다. 대한항공은 주2회를 띄운 반면, 에어프랑스는 1회밖에 띄우지 못했다. 에어프랑스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도 주2회 운항할 것을 요구해왔다. 조중훈은 “에어프랑스가 주2회 운항하면 대한항공은 주3회 운항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에어프랑스의 요구는 정당했고 대한항공의 답변은 무리가 따랐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협상은 결국 이루어졌다. 조중훈의 설득에 수긍한 엘리제궁 프랑스 대통령궁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파리에서 협상이 열렸을 때 대한항공 측 대표가 자사 참석자 소개를 마치자 에어프랑스 측 대표가 “당신들 중에 소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아마도 엘리제궁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조중훈은 한진상사를 설립할 때부터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한진상사는 직원복지 차원에서 인천에 지정병원을 두었는데, 조중훈은 그 병원 원장과 가깝게 지내며 병원에 들를 때마다 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서와 문학서를 빌려다 보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부터 깊어진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조예는 훗날 대한항공이 파리노선을 개척하고 프랑스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조중훈은 프랑스 사람들과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을 곧잘 감화시키곤 했다.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줄줄 암송해 프랑스 고관대작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러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난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최신 항공기를 확보하고 신규 노선을 잇달아 개설하면서 대한항공은 고공비행을 시작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72년 처음으로 2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8억 원으로 늘었다. 인수 당시 액면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대한항공 주가는 8배까지 치솟았고, 투자자들은 투자금의 50퍼센트나 배당받는 쾌거를 거두었다.

에어버스를 구매할 당시 대한항공 안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밖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자칫 한국과 프랑스 간 외교마찰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한항공 성장의 발자취를 되짚어볼 때 에어버스 항공기 구매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회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중훈의 ‘지고 이기는’ 지혜가 또 한 번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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