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버스로 유럽 하늘을 열다
대한항공의 점보기가 태평양을 날아다니게 되자 조중훈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1971년 초 일찌감치 조사단을 꾸려 유럽시장을 파악해두고 그해 말에는 파리에 영업소도 설치했다. 유럽노선을 뚫기 위한 전초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 각국은 자국기를 애용하면서도 항공사들은 미국 항공사들과 대적하기 위해 범유럽의 기치 아래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시장에 극동의 신생 항공사가 노선을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까다로운 유럽시장에 단독으로 뛰어드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에어프랑스와 손잡고 파리 취항을 추진했다.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71년 가을, 조중훈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로부터 긴급한 요청을 받았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는 것이었다. ‘에어버스’라는 말에 조중훈은 할 말을 잃었다. 에어버스는 유럽의 신생 항공기 제작사로 항공기를 갓 생산한 상태였다. 성능과 안전 테스트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해 세계 어느 노선에도 투입되지 못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드골 정부는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으로 도약시킨다는 비전을 세우고 미국에 맞설 항공산업을 키우는 데 박차를 가했다. 에어버스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구심점으로 설립되었는데, 항공기 개발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영국, 독일, 스페인이 지분참여를 했다. 그 에어버스가 한국 정부에 항공기를 사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심각한 외교문제가 걸려 있었다. 당시 북한은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 WHO 단독가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옛 프랑스령 나라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를 통해 그들 나라의 표를 얻어 WHO에 가입한다는 계산이었다.
북한은 프랑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조건으로 프랑스로부터 2억 달러에 달하는 건설장비를 구매해 주었고, 그 결과 북한의 WHO 단독가입이 유력해졌다. 이것은 국제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당시의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한국 정부에 적잖은 위협이 되었다. 프랑스가 한국을 배제하고 북한과 손잡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 정부가 도시지하철 사업을 추진하면서 프랑스에 기술용역을 주기로 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판에 일본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외교단절을 운운할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갈등을 풀기 위해 김종필 총리가 프랑스 정부에 접촉을 시도했는데, 프랑스 정부가 관계를 개선하려면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고 한 것이다. 규모는 앞서 북한이 구매한 건설장비 규모에 상응하는 2억 달러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조중훈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는 성능 파악도 안 되어 있는데다 에어프랑스와 루프트한자 외에는 어느 항공사도 주문하지 않고 있었다. 주주국인 영국과 스페인의 항공사들조차 주문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가 외교상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된 조중훈은 정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에어프랑스와 루프트한자에 이어 에어버스의 세 번째 고객이 되었다. 아시아 항공사가, 그것도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대한민국 항공사가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유럽의 신생 항공기 제작사의 비행기를 도입하겠다고 한 것은 프랑스 정부가 화를 누그러뜨리고 오히려 감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구매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조중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성능 검증이 되지 않은 항공기를 띄운다는 것은 안전상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계약서에 단서를 달았다.
「계약 후 5년 안에 100대 이상 팔리지 않을 경우, 구매한 항공기를 모두 반납하고 환불받겠음.」
에어버스는 당혹스러웠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에어버스는 큰 문제없이 5년이 되기 전에 200대가 넘게 팔려나갔다. 에어버스가 기대 이상으로 많이 팔려나간 데는 대한항공의 덕도 컸다. 대한항공이 에어버스를 구매하자 다른 나라 항공사들도 하나둘 구매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어버스를 구매하면서 조중훈은 실질적인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항공기가 취항하는 공항마다 본사 정비기술자들을 충분히 배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직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만큼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만전을 기한 것이다.
대한항공이 에어버스를 구매한 것은 한국과 프랑스간 외교마찰을 풀고 유대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의 성장에도 커다란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외교적 문제를 푼 이상 조중훈 입장에서도 에어버스를 구매하는 것이 ‘울며 겨자 먹기’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했다.
조중훈은 에어버스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파리 취항을 내걸었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500명도 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승객이 훨씬 더 많았다.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에어프랑스가 안 될 일이라며 펄쩍 뛰었지만, 조중훈은 에어버스의 고객사임을 강조하며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을 이끌어냈다. 1973년 조중훈이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그해 10월 6일 대한항공은 서울과 파리를 잇는 북극항로를 타고 일본과 미주에 이어 마침내 유럽에 진출하게 되었다.
조중훈은 파리노선에 화물기를 먼저 띄우고 1년 후 여객기를 띄웠다. 미주노선을 개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화물기 운영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하고 시장상황을 충분히 파악한 것이다. 그는 노선을 개척할 때마다 이 원칙을 지켰다. 다른 항공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유럽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리면서 대한항공은 세계일주 노선망 구축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유럽의 관문이자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인 파리에 취항하면서 동북아발 유럽행 항공 수요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 내 다양한 주요 목적지로 이동하는 승객에게 커다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나아가 한국과 유럽 간 교역과 문화 교류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파리의 지정학적 의미를 고려한 조중훈의 유럽노선 개척은 오늘날 대한항공이 유럽노선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단초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파리를 유럽노선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독일보다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십분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서울-파리 노선은 개척할 때부터 대한항공에 유리한 것이었다. 대한항공은 주2회를 띄운 반면, 에어프랑스는 1회밖에 띄우지 못했다. 에어프랑스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도 주2회 운항할 것을 요구해왔다. 조중훈은 “에어프랑스가 주2회 운항하면 대한항공은 주3회 운항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에어프랑스의 요구는 정당했고 대한항공의 답변은 무리가 따랐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협상은 결국 이루어졌다. 조중훈의 설득에 수긍한 엘리제궁 프랑스 대통령궁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파리에서 협상이 열렸을 때 대한항공 측 대표가 자사 참석자 소개를 마치자 에어프랑스 측 대표가 “당신들 중에 소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아마도 엘리제궁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조중훈은 한진상사를 설립할 때부터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한진상사는 직원복지 차원에서 인천에 지정병원을 두었는데, 조중훈은 그 병원 원장과 가깝게 지내며 병원에 들를 때마다 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서와 문학서를 빌려다 보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부터 깊어진 프랑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조예는 훗날 대한항공이 파리노선을 개척하고 프랑스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조중훈은 프랑스 사람들과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을 곧잘 감화시키곤 했다.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줄줄 암송해 프랑스 고관대작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러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난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최신 항공기를 확보하고 신규 노선을 잇달아 개설하면서 대한항공은 고공비행을 시작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72년 처음으로 2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8억 원으로 늘었다. 인수 당시 액면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대한항공 주가는 8배까지 치솟았고, 투자자들은 투자금의 50퍼센트나 배당받는 쾌거를 거두었다.
에어버스를 구매할 당시 대한항공 안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밖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자칫 한국과 프랑스 간 외교마찰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한항공 성장의 발자취를 되짚어볼 때 에어버스 항공기 구매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회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중훈의 ‘지고 이기는’ 지혜가 또 한 번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면 구름 위로 올라가라
조중훈은 충분한 환경 분석과 내부 분석을 통해 위기요인과 기회요인을 도출하고 대응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환경에 의해 기업이 지배되는 결정론적 전략보다는 불리한 환경을 사업에 유리하게 전환하고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는 전략적 선택론자였다. 불황기에는 비용을 줄여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시장환경이 급변하는 것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는 공격적인 경영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조중훈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대한항공 화물기가 파리에 취항한 1973년 10월 6일은 공교롭게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면전이 발발한 날이었다. 1차 오일쇼크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하늘로 비상하던 대한항공에도 먹구름이 엄습해 왔다. 항공기의 동력을 끊는 유가급등은 항공사에게는 악재 중의 악재다.
아랍의 공격은 세계 항공업계에 대한 폭격이나 다름없었다. 초기에 고전했던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자 페르시아만 6개 석유수출국은 원유 값을 17퍼센트나 올렸다. 이어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원유 생산을 매월 5퍼센트씩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전쟁의 파편은 대한항공에도 날아들었다. 연료비 부담이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조중훈의 머릿속은 온통 기름걱정뿐이었다. 당장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 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놓아야 할 만큼 절박했다. 당장 5,000만 달러가 필요했다.
조중훈은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지불 보증을 부탁했지만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런데 소시에테 제네랄의 로제 총재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한진이나 대한항공, 한국 정부가 아니라 ‘조중훈’이라는 개인의 신용을 믿고 지불보증을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조중훈에 대한 프랑스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조중훈이라는 브랜드가 기업이나 국가 브랜드보다 담보가치가 크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조중훈은 훗날 소시에테 제네랄과 합작해 한불종합금융을 설립하기도 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위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오일쇼크는 전 세계 경기침체로 이어졌고 항공 수요도 급격히 감소했다. 게다가 항공기의 대형화로 공급과잉인 시장에 베트남전이 끝나면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항공기까지 투입되자 세계 항공업계는 빈사상태에 빠졌다. 미국 최대 항공사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은 오일쇼크로 수천 명의 직원을 감원할 정도였다.
대한항공도 여객은 물론 화물 수요까지 급격히 감소하면서 1974년 80억 원의 대규모 적자를 냈다. 시련이었다. 조중훈은 절망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면 구름 위로 올라가는 조종술을 알고 있었다.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을 높여갔다.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호황일 때 불황을 대비하는 것처럼 불황일 때 호황을 대비한 것이다. 외국 항공사들이 20~30퍼센트씩 감원하는 상황에서도 조중훈은 오히려 임금을 인상하면서 직원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일본에 사원아파트를 지어 현지 직원들의 사기도 진작시켰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추진했다. 전 세계 기업이 움츠리고 있을 때 대형기를 앞세워 장거리 노선을 계속 확장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김포공항 인근에 대한항공과 계약을 맺은 외국 항공사들의 기내식을 조달하는 케이터링 서비스 빌딩도 지었다. 위기 상황에서 최고경영자의 선택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불황에서의 대규모 투자는 더욱 그랬다.
장남 조양호 현 한진그룹 회장가 대한항공에 입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국 유학 중이던 조양호는 병역을 위해 귀국해 전방과 한진상사가 진출해 있는 베트남에서 근무한 후 전역 후 미국지사에서 자재 쪽 실무를 쌓고 돌아와 항공기 정비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석유파동으로 조중훈에게 모진 시련을 안겼던 중동은 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기회로 떠올랐다. 막대한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 국가들은 대규모 경제개발에 착수했고, 국내 기업들이 앞다퉈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동붐이 시작된 것이다. 1974년 400명에 불과했던 중동행 국내 기술자는 이듬해 7,000명으로 늘어났고 건설 수주가 본격화된 1976년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석유파동 때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공격경영을 펼쳤던 조중훈의 해법이 적중한 것이다. 1975년 대한항공의 매출액은 1,000억 원을 돌파했고 원가 인상을 생산성 향상으로 막아내 약간의 흑자까지 냈다.
조중훈은 중동 정기노선을 개설할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건설현장을 돌아보며 구상한 것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1976년 바레인노선 부정기 운항을 계속해 14차례에 걸쳐 많은 인력과 화물을 수송했다. 중동 최대 시장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들어가기 위해 사우디항공과 공동운항협정 체결도 추진했다.
중동에 정기노선을 개설하는 것은 간단치가 않았다. 왕복 2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인데다 중간 국가에서의 이원권 확보가 쉽지 않아 중간 시장 수요를 흡수할 수 없었다. 조중훈은 그래도 밀어붙였다. 중동노선 주변국에 항공협정 체결을 요청하는 한편, 바레인에 영업소를 개설하고 사우디, 이란, 쿠웨이트, 시리아 등 중동 10개 국에 총판대리점을 설치했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1976년 5월 서울과 바레인을 연결하는 정기 여객노선을 개설했다. 두 달 후에는 이 노선을 스위스 취리히까지 연장했다. 서울-바레인 정기노선의 첫 해 수송인원은 1만3,500명에 달했다. 대성공이었다.
대한항공이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정기노선을 개설한 것은 1977년 4월이었다. 1년이 넘는 마라톤협상의 결과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 끝에 제다에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 2주 후에는 사우디항공과 공동운항 하는 형태로 다란에도 노선을 개설했다. 이듬해에는 쿠웨이트에도 정기 여객노선을 개설했다. 이란, 이라크, 요르단 지역으로 인력 진출이 늘어나면서 취항 직후부터 대형 기종을 투입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중동으로 가는 기술자들이 몰려들자 사우디대사관은 대한항공 탑승권이 없으면 비자를 내주지 않을 정도였다. 중동특수는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대한항공은 중동 6개 도시에 취항했고, 중동붐은 대한항공이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항공사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하나가 베트남전이고, 다른 하나는 중동붐이었다. 조중훈은 두 차례의 기회를 모두 포착했다.
중동붐이 한창일 때 말레이시아항공이 우리 정부에 취항 허가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당시 말레이시아항공은 중동 각국에 노선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중동붐으로 늘고 있는 우리 근로자들을 고객으로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 정부가 말레이시아항공에 취항권을 내줄 경우 대한항공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정부가 취항허가를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대건설이 말레이시아와 페낭대교 건설을 수주하는 빅딜을 벌이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페낭대교 건설권과 서울 취항권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우리 정부에 한 상태였다. 현대건설이 페낭대교 건설 수주를 우리 정부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어 반대급부인 말레이시아항공의 서울 취항 허가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조중훈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늘 “지고 이기라”고 했던 그도 그때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말레이시아항공에 하늘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중훈은 전방위적으로 정부를 설득했다. 주 駐말레이시아 대사가 취항 ‘허가’ 서명을 하기로 했다가 이튿날 아침 우리 외교부의 ‘보류’ 조치가 나올 정도로 긴박한 공방을 거듭한 끝에 조중훈은 중동으로 가는 하늘길을 지켜냈다.
세계의 하늘을 나는 대한의 날개
언제나 위기와 기회가 반복되었다. 오일쇼크라는 위기 뒤에 중동붐이라는 기회가 찾아왔고, 중동붐이 한창이던 1978년 말 2차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덮쳤다. 이란이 회교혁명 이후 석유 수출을 중단했고, 때맞춰 석유수출국들은 유가인상을 발표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었던 원유 가격은 20달러를 돌파했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았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2.12사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1차 오일쇼크로 인한 항공시장 불황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은 자국 항공사의 권익과 자국민의 편익을 위해 항공규제완화법과 국제항공운송경쟁법을 발효했다. 항공시장은 경쟁시장으로 바뀌었고 노선개설 자유화로 36개였던 미국 항공사가 123개로 늘어났다.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델타 등 미국 대형 항공사들이 태평양노선에 대거 진출했다. 동남아 항공사들까지 가세해 태평양노선은 공급과잉이 되었다. 저운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항공사들의 수지가 크게 악화되었고 팬암항공을 비롯해 일부 항공사가 도산하고 말았다.
조중훈은 이번에도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활용했다. 인력을 감축하는 대신 민영화 초기부터 숙원사업이었던 뉴욕 취항을 감행했다. 아시아 항공사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룬 쾌거였다. 뉴욕노선은 흑자를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세계 최대 도시라는 상징성이 있는 만큼 항공사와 국가의 위상을 생각할 때 중요했다.
1979년 3월 대한항공이 뉴욕에 취항하겠다고 하자 현지 항공사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가장 결사적으로 반대한 항공사는 플라잉타이거였다. 대한항공이 뉴욕에 취항하면 시장을 빼앗길 것이라며 지방정부를 앞세워 취항을 원천봉쇄 하려 들었다. 조중훈은 플라잉타이거의 사주가 중국계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으로 날아가 사주를 만나 같은 동양인임을 강조하며 설득하는 동시에 플라잉타이거 경영진에게는 서울-뉴욕 노선에서 양사의 항공화물 규모를 투명하게 공개하자는 강수를 두어 협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2차 오일쇼크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역사적인 뉴욕 취항을 며칠 앞두고 기름을 구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뉴욕에서 첫 출발 할 비행기를 띄울 기름도 없었다. 조중훈은 임원을 현지에 급파했다. 역시 취항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다른 항공사들도 항공유를 줄여 공급받는 실정이라 신규 취항하는 항공사에 배정할 몫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중훈은 “대한항공이 맨해튼에 떠내려간다!”고 탄식했다. 뉴욕노선은 어느 때보다 치밀한 준비와 줄다리기협상 끝에 한미항공협정을 개정해 어렵사리 따낸 노선이었다. 연료 때문에 취항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중훈은 끈질기게 붙어서 안 될 것이 없다며 뉴욕에서만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다른 지역 정유사들과도 접촉해 보라고 지시했다. 텍사스로 날아간 임원에게서 드디어 최소한의 항공유를 확보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후에도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기름을 구하기 위해 알래스카 페어뱅크스까지 뛰어다녔고, 평소의 두 배 가격에도 마다할 형편이 아니었다. 연료를 비축하기 위해 해외에서 들어오는 비행기에 연료를 가득 채워 귀항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대한항공은 1980년에만 300억 원대 적자를 냈다. 항공공사 인수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하자 조중훈은 항공기 가동률을 최대한 높였다. 비행기는 날고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며 영업 위주로 되어 있던 항공스케줄을 항공기 가동률 위주로 개편했다. 낮에 국내노선이나 한일노선에 운항한 항공기를 밤에 동남아노선에 띄웠다. 장거리노선도 일본이나 동남아 여러 도시에서 서울을 경유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국내 승객만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지방노선을 확장하고 한일노선 운항 편수를 늘려 일본인 수요를 서울로 끌어들여 미국과 유럽으로 수송했다.
‘비용 20퍼센트 절감, 수입 20퍼센트 증대’ 캠페인을 전사적으로 벌여 사소한 비용까지 철저하게 줄였다. 1980년 초, 화물기 두 대를 도입할 때는 기체의 중량을 줄이기 위해 페인트 도장도 하지 않았다. 점보기 한 대를 칠하는 데 드럼통 6개 분량의 페인트가 들어갔다. ‘누드점보기’로 연간 5,000갤런의 연료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적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저원가 저운임’의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노력의 결과는 경영성과로 나타났다. 대한항공은 혹독한 오일쇼크 속에서도 1982년 다시 흑자를 달성했다. 세계 항공업계가 그해 82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상황이었다. 폭풍우를 뚫고 힘차게 날아오른 대한항공을 모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창립 14주년을 맞은 1983년 3월 조회에서 조중훈이 말했다.
“우리는 치열한 저운임 경쟁 속에서 위기와 시련을 용기와 지혜와 인내로 이겨냈다. 경영은 호조건과 악조건이 되풀이된다. 항상 기반을 다지고 경쟁력을 키워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위기와 시련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값진 교훈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조중훈의 혜안은 사업에 대한 열정과 사업을 하는 이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의 결실이다. 혹독한 오일쇼크에도 한계를 극복하는 집념과 초강수의 대응전략으로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 포착은 경험을 바탕으로 생긴 예지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설립 당시 대한항공의 마크는 새가 원을 약간 벗어난 형상이었다. 한계를 뚫고 세계의 하늘로 날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1984년 대한항공은 창립 15주년을 맞아 새로운 CI 기업이미지를 선포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오늘날 대한항공의 상징이 된 태극마크다. 태극마크 디자인에도 조중훈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새로운 상징을 구상하던 중 항공기 프로펠러가 고속 회전할 때 태극문양이 나타나는 것을 포착했다. 이를 보잉 디자이너에게 알려주었고, 그 결과 한민족의 전통과 국적기의 위상을 형상화한 태극마크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마크는 태극기의 태극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공군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태극마크는 기체의 스카이블루와 어우러지면서 ‘세계의 하늘을 나는 대한의 날개’로 이미지를 굳혔다.
부실덩어리 항공공사를 인수할 때 “항공을 예술처럼 하고 싶다”고 했던 조중훈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의 위기를 뚫고 태평양 횡단에 이어 유럽 하늘에 그림처럼 길을 수놓았다. 하지만 유럽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거대한 대륙, 중국이 가로막고 있어 명실상부한 ‘하늘의 실크로드’라고 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안은 채 유럽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던 조중훈에게 만리장성 저편에서 운명처럼 기회가 날아왔다. 조중훈은 그 기회를 포착하고 미완의 실크로드에 한 점을 찍었다. 화룡점정 畵龍點睛. 눈동자를 찍는 순간 잠자던 용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조자룡의 기지, 죽의 장막을 걷어내다
1983년 어린이날 오후 2시. 미확인 비행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넘어와 춘천 미군기지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승객과 승무원 105명을 태우고 중국 선양공항을 이륙해 상하이로 가던 중국민항기가 무장 괴한들에 의해 공중납치된 것이다. 비행기를 끌고 타이완으로 향하던 납치범들이 연료가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방향을 바꿔 휴전선을 넘자, 즉각 출동한 우리 공군 전투기 편대가 10분 만에 춘천기지 활주로에 착륙을 유도했다. 승객들은 무사했지만 승무원 한 명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전쟁이 일어난 줄 알았던 국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정부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적성국인 중국 항공기의 불시착은 그것만으로도 비상사태였다. 만리장성은 높았고, 한국과 중국은 대화의 물꼬조차 트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불씨로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한반도는 불안에 휩싸여 술렁거렸다.
당황하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정부는 1978년 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개방정책을 표방한 후 이제 막 ‘죽의 장막’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한국과는 외교적 접촉이 없었다. 1980년 중국 정부가 공식석상에서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를 언급하고, 1982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식량위원회 WFP 세미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한 것이 양국간 교류의 전부였다.
피랍 항공기의 한국 불시착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민항공사는 즉시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묻는 전문을 보내왔다. 양국간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중국측이 아직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전문에는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라는 국가명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중국 정부가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했다. 중국민항은 다급한 나머지 이희성 당시 교통부장관 대신 김철용 교통부 항공국장을 수신인으로 전문을 보내왔다. 이를 놓고 외교적 해석이 분분했지만, 중국민항은 훗날 “한국에 전문을 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싱가포르 국제회의에서 김철용 국장과 인사를 나눈 사람이 중국민항에 있어 항공기 소재 확인을 부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중국은 한번 관계를 맺은 사람을 공식 외교 채널보다 믿는 경향이 강하다.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확인한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셴투 沈圖 민항 총국장 일행의 방한을 요청해왔다. 우리 정부도 외무부 공노명 1차관보, 김병연 아주국장, 김철용 교통부 항공국장 등으로 급히 협상단을 구성했다. 불시착 이틀 후 중국 승무원과 기체 송환을 위해 중국 정부의 대표단 33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적인 접촉이었다. 한.중 외교사에 물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중국 대표단이 방한하는 날, 조중훈은 조용히 춘천으로 향했다. 불시착한 항공기의 엔진과 랜딩기어가 어느 정도 손상되었는지 기술자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비사만 보내도 될 일이었지만 조중훈은 직접 가는 쪽을 택했다. 자신의 역할이 단순한 기술자문 이상이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중국 대표단의 방한에 우리 정부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언론은 당장이라도 한.중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질 것처럼 앞서가고 있었다. 조중훈의 생각은 달랐다. 34년 동안 단절되었던 관계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자칫 외교적 마찰이 불거질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조중훈은 민간항공사인 대한항공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중국 대표단의 협상은 조중훈의 예상대로 시작부터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양국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서명인의 직위와 자격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조중훈은 서울로 돌아와 양국 대표단을 롯데호텔로 초청했다. 협상은 일단 접어두고 손님들이 왔으니 한국의 항공사 대표로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오찬장의 공기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냉랭하기만 했다. 조중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삼국지〉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국가경제에 보탬이 된다면 언제든지 온 몸을 바쳐 일하는 조자룡 같은 사람이지요. 여기에 계신 공노명 선생님 한국 측 수석대표은 제갈공명 같은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는 조자룡이 책임지고, 외교에는 제갈공명이 적격이지요. 제갈공명과 조자룡이 머리를 맞댄다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뭐가 있겠습니까.”
발음이 유사한 조자룡과 조중훈, 제갈공명과 공노명을 절묘하게 빗댄 조중훈의 화술에 중국 대표단이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데올로기나 문화에서 전혀 공감할 수 없을 줄 알았던 한국사람이 중국고전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중국 대표단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오찬장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 날 양측 대표단은 피랍기 승객과 승무원 송환에 관한 합의 각서를 교환했다.
조중훈은 14년 전인 1969년 대한항공 YS-11기가 납북된 일을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으로 중국민항기의 승객과 승무원, 기체를 무슨 일이 있어도 중국에 돌려보내주고 싶었다. 이런 조중훈의 뜻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셴투 민항 총국장에게 전달되었다. 중국민항은 중국 정부에 ‘칼 KAL기 피랍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조중훈의 의지를 담은 보고서를 올렸고, 중국 정부는 경계심을 상당히 풀게 되었다. 오히려 조중훈의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후 중국민항 총국장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때마다 조중훈과 장남 조양호 회장을 찾아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인사를 전하고 있다.
조중훈은 중국 대표단이 베이징으로 떠난 후에도 뒷마무리에 만전을 기했다. 피해 정도가 예상보다 크면 부품 교환이 필요할지 모른다며 사고 비행기와 동일한 기종을 갖고 있는 홍콩과 영국 항공사에 전문을 보내 필요할 경우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중국과 대한항공 기술진으로 구성된 한.중합동기체점검반이 이틀에 걸쳐 정밀조사한 결과, 무리한 불시착으로 엔진 3개 중 오른쪽 엔진 코일이 절단되고 랜딩기어 휠 브레이크에 손상을 입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한항공은 손상 부위를 보수한 뒤 안전한 이륙을 위해 기체를 김포공항으로 옮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춘천기지는 활주로가 짧아 기체 무게를 줄여야 했다. 우선 대한항공 기술진이 투입되어 좌석 110개를 떼어냈다. 객실의자와 수하물 등을 옮기려니 트레일러 두 대가 가득 찼다. 타이어도 새 것으로 교체했다. 대한항공의 완벽한 지원 아래 피랍기는 춘천기지를 무사히 이륙해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당시 이륙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 때문에 춘천 지역 숙박시설이 만원을 이룰 정도로 국민의 관심은 대단했다.
조중훈은 비행기가 김포에서 베이징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급유도 지원했다. 중국 승무원들을 위해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특별 기내식을 마련하고, 인삼주와 넥타이, 동화책 같은 선물꾸러미까지 전달했다. 외교적인 긴장관계 때문에 우리 정부가 베풀지 못한 호의를 조중훈이 대신한 것이다. 피랍기는 베이징으로 향하는 3시간 16분 동안 대한항공에 두 차례나 감사 전문을 보내왔다.
중국 대표단 단장이었던 셴투 총국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소개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1930년대에 상하이를 방문한 적이 있는 조 회장은 중국 문화를 잘 알고 열정적이며 우호적인 사람이다. 그가 회담을 맡게 되면서 긴장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뀌게 되었다. 그는 이후 중국과 한국의 민간교류에서 지속적으로 가교 역할을 했다.」중국을 거쳐 러시아 영공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최단항로를 개척할 때도 조중훈의 외교력은 놀라움 자체였다. 86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조중훈은 중국 정부에 기막힌 제안을 했다. 중국선수들이 서해 영공을 통과해 서울로 바로 올 수 있게 하자고 한 것이다. 당시엔 중국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여서 서울-베이징 노선은 양국 해안을 따라 U자로 둘러가야 했다.
조중훈의 제안을 중국 정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안 자체가 합리적이기도 했지만 조중훈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취지가 컸다. 조중훈은 중국 정부가 허가한 내용을 우리 정부에 즉각 알려주었고 우리 정부도 미세조정을 거쳐 이를 허가해주었다. 양국 정부간 협상이 아니라 조중훈의 중개로 단거리 직항노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베이징 서해노선이 뚫리자 중국과 러시아를 통과해 유럽으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이 열리게 되었다. 조중훈은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에 중국을 방문해 셴투 총국장에게 전세기 운항허가 취득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이듬해 봄 중국 정부로부터 한국 항공사의 전세기 운항과 단계적인 확대에 대한 확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994년 여름, 마침내 양국간 항공협정이 타결되어 베이징과 톈진, 선양에 정기노선을 취항하기에 이른다.
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고 나서 유럽의 하늘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아시아와 유럽,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국제노선을 급격하게 확장해 나갔다. 1984년 프랑크푸르트에 취항했고, 1988년 런던, 1990년 모스크바와 시드니, 1991년 로마, 1994년 블라디 보스토크와 샌프란시스코, 베이징 취항이 숨돌릴 틈 없이 이어졌다. 조중훈의 집무실에 걸린 대한항공의 노선도는 거미줄처럼 새카맣게 변해갔다. 항공사의 위상과 규모는 취항노선 수로 결정된다. 1971년 로스앤젤레스 취항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시작된 노선 개척은 20여 년 만에 대한항공을 국제적인 항공사로 변모시켰다.
태평양노선에 이어 유럽노선에 태극마크를 단 항공기가 날아다니면서 조중훈은 세계일주노선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자국기를 타고 해외에 가고 싶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소망으로 시작된 대한항공의 역사는 대한의 날개에서 세계의 날개로 뻗어나갔다. 항공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세계 굴지의 항공사들과 날개를 나란히하는 항공사를 키우면서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부실 항공공사를 맡아 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조중훈은 어려운 사정이 생기면 꼭 세 번만 대통령을 찾아가 의논하겠다는 조건을 걸었었다. 그러나 그저 말뿐이었다. 단 한 차례도 대통령을 찾아가 하소연한 적이 없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대한항공을 키우고 이륙시켰다. 항공공사 인수대금도 인수 후 5년의 거치기간이 끝나는 날 당초 계약과는 달리 분할하지 않고 한꺼번에 상환했다.
조중훈이 개척한 길은 사업의 길만이 아니다. 그가 개척한 땅길, 바닷길, 하늘길은 시공을 뛰어넘는 국제화의 길이었다. 이념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소통과 공감의 길을 연 것이다.
전투기를 만든 항공사
조중훈은 배를 구입할 때도 언제나 발품을 팔아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만져보고 결정했다. 같은 배라도 얼마나 오랫동안 바닥이 바닷물에 잠겨 정박해 있었는지부터 체크했다.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부식 상태까지 보았던 것이다.
항공에서는 두세 배 더 현장에서 살았다. 새벽잠에서 깨면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으로 나가 정비 현장을 둘러보았다. 작업장에 나뒹구는 나사못 하나까지 직접 주워 작업대에 올려놓는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항공은 안전과 정시성이 생명이고, 이는 현장에서 직접 뛰는 정비 기술자들의 손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추운 겨울에는 철야 작업하는 정비사들에게 방한복을 지급하고, 야간 작업을 하다 깜빡 잠든 정비사를 보아도 야단치거나 깨우는 법이 없었다. 현장에서 그들의 노고를 함께 보고 느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는 항해 중에도 고칠 수 있지만, 비행기는 한번 이륙하면 수리가 불가능하다. 조중훈은 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며 만전을 기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하기로 하고 나서 조중훈은 항공 관련 외국서적을 독파했다. 정비사가 고장 난 엔진의 문제에 대해 브리핑할 때 포인트를 잡아줄 정도가 되었다. 한번은 외국에서 온 엔진회사 사장에게 즉석에서 “이게 미국이 독일의 제트엔진 정보를 구해 만든 엔진”이라고 말했다. 엔진회사 사장이 어리둥절해 하자 전문 화학용어를 써가면서 제트엔진의 재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당시 화공학을 전공한 임원이 통역을 했는데 자신도 그 용어를 잘 몰라 나중에 찾아봤더니 정말 있는 용어였다.
정비와 수리를 반복하다 보면 부품을 알게 되고 엔진도 알게 된다. 조중훈은 비행기도 자꾸 고치고 분해하다 보면 언젠가는 비행기를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오랜 경험을 가진 글로벌 항공사들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은 조중훈을 수송외길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75년 3월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추가로 발견되자 한반도는 긴장에 휩싸였다. 4월에는 남베트남 정부가 끝내 항복하고,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었다. 자주국방이 최대 국정 현안으로 떠오른 이 무렵, 남부지방 방위산업체를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1980년대 중반에 전투기를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로 불리는 전투기를 10년 안에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얘기를 국민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박 대통령은 조중훈에게 전투기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항공기 생산에 관한 기술이 일천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공군과 대한항공을 놓고 저울질한 끝에 대한항공을 선택한 것이었다. 막대한 투자비용과 불확실한 수익성을 감안하면 항공기 제작은 그룹 전체의 사운을 거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설립된 조선항공공업㈜이 일본에서 시설을 옮겨다 부산에 공장을 짓고 항공기 제조에 착수한 적이 있었고, 화신산업의 박흥식도 안양에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해 시험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에 의해 이 시설들이 해체되면서 우리나라의 항공산업의 싹이 잘리고 항공기 제작은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남아있었다. 1974년 겨울, 정부는 미국 항공기 제작사들에 용역을 주어 국내 항공 관련 업체들의 시설과 기술 수준을 평가하도록 했다. 노드롭, 맥도널 더글라스, 록히드 같은 굴지의 회사들이 참여한 용역사업은 항공기 공동 생산을 위한 구체적인 계약 단계로까지 접근했으나 여건 미비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조중훈은 1975년 대한항공 정관을 고쳐 사업 목적에 ‘항공기 제조 및 판매사업’을 추가했다. 수송외길을 고집했던 조중훈이 처음으로 제조업에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700억 원을 투입해 김해공항 인근 늪지대를 메워 항공기 공장을 지었다.
조중훈은 우선 헬기 조립에 착수했다. 당시 북한이 보유한 수백 대의 전차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헬기가 필요했다. 육군이 적극 지지한 벨 Bell의 UH-1 모델이 검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가격이 턱없이 높은데다 병력수송용이어서 미사일을 장착한다 해도 공격용 헬기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UH-1은 소음 때문에 쉽게 노출돼 오히려 전차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조중훈은 동생 조중건을 휴즈 Hughes로 보내 500계열을 알아보라고 했다. 500계열은 기체가 작아 제작비가 적게 들면서도 소음이 적고 기동성이 뛰어나 기습 공격용으로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반도 같은 산악지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조중훈은 500계열을 들여와 군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시연회를 열었다. 모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조중훈의 탁월한 식견은 장성들의 선입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원석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 시연 모습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대통령이 회의시간에 “휴즈 모델이 어떠냐?”고 물으면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조중훈은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500계열 생산을 위해 휴즈와 기술도입 계약을 맺었다. 우선 정비본부 산하에 사업부를 신설하고 500MD계열 이후 500MD/D 생산에 착수해 4대를 육군에 납품했다. 1976년 12월에는 김해헬기공장이 준공되었다. 조중훈은 정비본부 산하 사업부를 항공기 제작을 전담하는 사업본부로 승격하고 인원도 30명에서 240명으로 늘리고 양산체제를 갖추었다. 500MD/D 생산대수는 1980년 초 200대를 넘어섰다. 1978년에는 항공기 연구와 개발을 전담하는 항공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는 항공대를 비롯한 국내외 관련 연구기관과 교류해 항공기용 재료 개발과 항공기 설계 능력을 확보해 나갔다. 해외에 나가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1978년 국군의 날을 이틀 앞두고 조중훈은 연간 60대 규모의 전투기를 정비하는 사업계획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보고서를 미군에 제출해 태평양지역 미군 군용기의 정비 계약을 추진했다. 당시 미군 군용기 정비기지는 타이완에 있었다. 그러나 중.일 수교로 미국은 중국과 수교를 서둘렀고, 타이완 정비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었다. 국제정세의 긴박한 흐름을 읽고 있던 조중훈은 그동안 대한항공이 쌓은 정비 노하우와 500MD/D 생산 경험을 내세워 대한항공을 새로운 정비기지로 지정해줄 것을 미군에 요청했다. 대안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미군은 조중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듬해 1월 조중훈의 예상대로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었고, 대한항공은 미국의 주력 기종인 F-4 팬텀기 정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항공기 정비는 자동차 정비와는 달리 분해와 결합이 기본이고, 수리를 위해서는 생산하는 것 이상의 기술이 필요한 만큼 항공기 제조 노하우를 축적할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안정적인 거래선을 확보함으로써 경영 개선은 물론 외화 획득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항공기 제작의 기반을 다지고 있던 1979년 7월 어느 날, 조중훈은 박 대통령을 만났다. 박 대통령은 수익성도 보장되지 않는 헬기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80년대 중반까지 전투기를 우리 기술로 만들겠다고 국민과 약속한 것을 상기시켰다. 조중훈은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조중훈은 3년 안에 반드시 전투기를 출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선 기종 선정을 위해 항공기술연구소 안에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고, 10개월에 걸친 검토 끝에 기종을 노드롭 F-5E/F 모델로 정했다. 그러나 국방부와 노드롭의 협상이 한창이던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1년을 넘게 끌던 협상은 이듬해 11월에야 타결점을 찾았다. F-5E/F 기종의 판매와 면허생산 계약이 체결되고, 대한항공은 전투기 제작사로서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조중훈은 기술을 전수받을 전문가들을 노드롭에 파견하는 한편 공장을 짓고 설비를 확충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기술인력만 600명에 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공호’로 명명된 첫 국산전투기가 1982년 9월 9일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 김해공장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제공호는 활주로를 가뿐히 차고 올라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더니 북쪽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식장 상공에 나타나 한 차례 멋진 곡예비행을 뽐냈다. 대통령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앉아 있지 않았지만 조중훈은 3년 안에 전투기를 출고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본과 타이완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 전투기 생산국이 되었다. 제공호는 고성능 초음속 전투기로 당시 북한 공군의 주력기였던 미그-21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대한항공은 전투기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돈을 벌고자 시작한 사업은 아니었다. 방위산업은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하는 사업이기에 본전이면 족하다는 것이 조중훈의 소신이었다. 전투기는 국방력의 상징이며 자주국방이라는 국가적 대의에 기업이 동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제공호 사업이 막 시작되었을 때 항공우주사업본부를 맡고 있는 임원을 불러 대한항공이 방위산업으로 돈 벌었다는 얘기를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당부했다. 방위산업에서는 원가를 부풀리거나 비용을 과다하게 계상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조중훈은 적자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품질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수익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투자가 더 필요했지만 조중훈은 제공호를 만든 이후에도 항공기 제작을 계속했다. 무엇보다 제공호를 개발하기 위해 채용하고 육성한 많은 기술인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중훈에게 그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었다. 기술과 인력이 있으면 일감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며 사업을 계속 키워나갔다. 제공호 부품의 국산화율을 23퍼센트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설계기술을 꾸준히 축적해 1985년 독자 기술로 1인승 경비행기 ‘창공 2호’를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어 1988년 2인승 ‘창공 3호’, 1991년에는 ‘창공 91호’ 개발에 성공했다. 창공 91호는 국내 최초의 실용 항공기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항공은 전투기뿐 아니라 민항기 제작과 우주항공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보잉과 에어버스 항공기 제작에 참여한 데 이어 무궁화 1, 2, 3호의 본체 및 탑재체, 태양전지 패널, 다목적 위성의 본체 구조물까지 제작했다. 이렇게 축적한 기술은 오늘날 ‘나로호’ 개발을 주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조중훈은 사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국익과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앞섰다. 방위산업에 뛰어든 것도 국방에 기여하기 위함이었고, 아는 사업에 집중한다는 원칙이 뒷받침된 것이다. 항공사가 항공기 제작까지 하게 된 것은 사업으로서의 수직계열화 전략이기도 했지만 국익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 사업보국정신이 오늘날 대한항공이 항공기 제작의 역량을 갖추게 된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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