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의 매력
1966년 6월 어느 날. 조중훈은 베트남 퀴논항에서 미국 화물선의 하역을 지켜보며 넋을 잃었다. 눈앞에선 거대한 ‘갠트리 크레인’이 화물선에서 기관차만한 철제 궤짝을 하나씩 부두에 내려놓고 있었다.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40톤에 달했다. 그것을 배에서 부두로 옮기는 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열두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물량을 그 짧은 시간에 옮기다니!’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 속에 든 군수품은 따로 부리는 과정 없이 통째 트럭에 실려 부대를 향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중훈은 100개가 넘는 컨테이너가 다 내려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충격이었다.
컨테이너선의 출현은 범선의 바다에 증기선이 출현한 것에 맞먹는 해운의 혁명이었다. 컨테이너가 도입되기 전에는 잡화, 액체화물, 냉동화물 같은 여러 형태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도록 선박의 갑판을 이중으로 건조하고 화물의 특성에 맞춘 자체 하역장비까지 갖추어야 했다. 다양한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하역하는 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배 한 척에서 짐을 내리려면 꼬박 닷새는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방법을 모색하다 탄생한 것이 바로 컨테이너였다. 화물을 규격화된 컨테이너에 담아 야적장에 쌓아 두었다가 화물선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갠트리 크레인으로 신속하게 싣는 것이다.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 시스템을 갖춘 씨랜드는 하역비를 20분의 1로 줄이고, 정박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했다.
컨테이너는 다른 운송수단과도 효과적으로 연결되었다. 배에서 내린 화물을 곧바로 철도나 트럭으로 옮겨 실어 바닷길과 땅길을 하나로 잇는 해륙일관 海陸一貫 수송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컨테이너선은 건조비가 비쌀 뿐 아니라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전용터미널이 필요해 대규모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재래선은 ‘포트 투 포트 Port to Port, 항구에서 항구까지’ 서비스이지만, 컨테이너선 수송은 ‘도어 투 도어 Door to Door, 문에서 문까지’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육상수송체계도 겸비해야 했다.
경영자의 눈은 ‘발견의 눈’이다. 보는 것이 발견의 전부는 아니다. 퀴논항에서 컨테이너를 본 사람이 어디 조중훈뿐이었겠는가. 당시 국내 해운사들도 컨테이너의 존재와 위력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를 만들겠다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부러운 그림의 떡이었다. 조중훈은 같은 ‘그림의 떡’을 보고도 실제 사업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발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컨테이너라는 세계 해운 역사의 대발명 못지않은 경영자의 위대한 혜안이었다.
한진해운의 출항
퀴논항에서 컨테이너에 매료된 조중훈은 귀국하자마자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컨테이너선으로 우리나라 해운의 현대화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바다에는 여전히 소년 시절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선택한 해원양성소에서 바다를 만났고, 바다는 꿈을 펼칠 무대였다. 젊은 시절 화물선 기관사로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운왕의 꿈을 키웠다. 한진상사를 설립하면서 인천을 근거지로 삼은 것도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다에서 세상을 알게 되었고, 바다에서 꿈을 이루려고 했다.
1967년 7월 조중훈은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한진상사 시절에도 화물선 10여 척을 운용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해운사를 설립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장 컨테이너선을 도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컨테이너 하역과 일관수송에 필요한 항만시설을 구축하고 장비를 확보해야 했다. 당시 국내에는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없었다.
조중훈은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뛰어들었다. 컨테이너 시스템이야말로 수송을 현대화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중훈은 노르웨이에서 1만2,000톤급 화물선을 들여와 ‘오대호’라고 이름을 붙이고 한-미-일 정기항로에 투입했다.
1972년 드디어 컨테이너선을 확보했다. 일본 조선소에 컨테이너선 두 척을 주문해 한 척을 인도받아 부산-고베 항로에 투입했다. 이것이 국내 해운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인왕호’다. 예상대로 컨테이너선은 대진해운의 성장을 이끌었다. 1971년 2억 원 남짓이던 매출은 3년 만에 10배 이상 뛰었다.
원양어업에도 진출했다. 스페인에서 트롤어선 6척을 들여와 인도네시아 근해와 라스팔마스 등 대서양에서 조업했다. 그러나 대진해운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일쇼크라는 암초에 부닥치고 원양어업 불황까지 겹쳐 대진해운은 끝내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을 향한 조중훈의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70년 씨랜드와 총대리점 계약을 맺고 씨랜드의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입항해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를 통한 하역작업이 이루어졌다. 씨랜드 대리점에 우수인력을 배치해 컨테이너 해운 업무를 익히도록 하고, 해운사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1974년 5월, 그토록 기다리던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준공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중훈은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에 착수했다. 컨테이너선 운항에는 막대한 시설과 장비, 영업망, 그리고 전문적인 경영기법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씨랜드가 갖고 있던 세계 주요 항구의 시설과 장비를 이용하기로 했다.
조중훈의 가장 큰 특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선발주자들의 경험을 배우고 익혀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항공업에 뛰어들 때도 일본항공을 비롯해 선진 항공사들의 시행착오와 노하우를 공부했다. 항공이든 해운이든 앞선 회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곳곳에 남아 있는 파행의 흔적을 분석했다.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바로 늦게 시작하고도 더 빨리 더 크게 성장하는 비결이었다.
해운사 설립을 준비하던 조중훈은 1977년 초,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큰 사업이 시작되는 길목에는 항상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항공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육상운송과 항공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해운 발전에도 힘써 달라는 대통령의 격려까지 받게 되자 조중훈은 1978년으로 예정했던 컨테이너 선사 설립을 1년이나 앞당겼다. 오늘날 세계 1위 컨테이너 해운사로 우뚝 선 한진해운이 닻을 올린 것이다.
태평양의 장보고
조중훈은 한진해운 설립 후 씨랜드가 사용하던 중고 컨테이너선을 추가로 들여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사를 해보니 너무 낡아 경제성이 없어 현대중공업에 컨테이너선 두 척을 발주했다. 현대중공업이 최초로 수주한 컨테이너선이었다. 조중훈은 계속해서 컨테이너선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 일본에서 컨테이너선을 인수한 조중훈은 자신의 호를 따 ‘정석호’로 명명했다. 그후 인수한 선박 이름도 직접 지어 자신의 필체로 새겼다. 서울, 인천, 부산, 포항, 제주, 광양, 군산 등 국내 주요 도시 이름을 단 선박들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한국의 도시를 알렸다. 1985년부터는 뉴욕, 롱비치, 요코하마, 지룽, 사바나 등 해외 기항지 이름을 사용했다.
조중훈은 중동항로를 주목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산유국들이 대대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함에 따라 중동항로의 물동량은 4년새 3배 이상 늘었다. 조중훈은 미국 씨랜드와 공동으로 정석호를 중동항로에 투입했다. 중동항로는 만만치 않았다. 중동항로에 물동량이 늘어나자 중국, 일본 등 주로 아시아권 해운사들이 취항하던 이 항로에 미국, 영국 등의 대형 해운사들이 가세하면서 경쟁이 가열되고 운임 덤핑까지 나타났다. 1978년에는 오일쇼크로 물동량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
한진해운은 중동항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정석호를 중동항로에서 철수시켜 한일항로에 투입해야 했다. 중동노선은 수익에서는 조중훈은 해운의 미래가 컨테이너의 발전과 연결될 것을 직감했다. 실패했지만 원양 정기선 운영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음으로 조중훈은 극동-북미 항로에 주목했다. 극동-북미 항로는 세계 컨테이너선의 황금항로였다. 당시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30퍼센트가 이 항로를 오갔고, 한국 수출입 화물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미주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선대를 키우고 영업망을 넓혀야 했다. 미국 오클랜드에 미주본부를 신설하고 롱비치, 뉴욕, 샌프란시스코, 휴스턴에 지점을 설치했다. 또 극동지역 영업망 확장을 위해 도쿄에 지점을 내고 고베와 요코하마에도 사무소를 추가했다.
1979년 한진해운은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서울호’를 인수했다. 컨테이너 1,150개를 적재할 수 있는 서울호를 극동-북미 항로에 취항시켰다. 역사적인 태평양 일주의 닻을 올린 것이다. 이날 조중훈은 대한항공 여객기에 화주 대표와 임직원 등을 태우고 2만1,000피트 상공에서 서울호의 취항을 지켜봤다. 서울호는 화물을 싣고 부산항을 출발해 일본 고베와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고, 돌아올 때도 화물을 가득 실었다.
한진해운은 서울호에 이어 ‘인천호’, ‘부산호’, ‘포항호’, ‘제주호’, ‘광양호’를 차례로 투입하며 정기 컨테이너선대를 구성해갔다. 1986년에는 북미동안항로에도 취항했다. 당시 북미동안항로는 세계적 선사들이 초대형 경제선을 투입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대한선주가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철수해 국적선 공백상태에 있었다. 조중훈은 한진해운이 세계적인 선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북미동안항로 취항이 반드시 필요한 선택이며, 국가의 주요 무역항로를 국적선 공백상태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사명감에서 취항을 결정했다. 한진해운은 ‘뉴욕호’를 비롯해 당시 최신형 컨테이너선 6척을 북미동안항로에 집중 투입했다. 기항지는 홍콩, 지룽, 부산, 고베, 요코하마, 롱비치, 뉴욕, 사바나 등이었다.
이로써 조중훈은 태평양의 바닷길을 활짝 열었다. 15년 전 화물기로 태평양의 하늘길을 열었을 때의 감회를 다시 한 번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 옛날 식민지 청년으로 일본 배를 타고 상하이에 갔을 때 ‘반드시 우리 배를 타고 오겠다’던 다짐은 중국해가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서 실현되었다.
조중훈의 바닷길 개척은 국가의 무역항로를 연다는 사명감에서 시작된 선택과 집중이었다. 태평양노선을 ‘선택’하고 컨테이너선에 ‘집중’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선사들과는 차별화가 가능해졌고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한진해운이 태평양 횡단을 시작한 후 한진해운은 파도를 가르며 항해를 계속했다. 하지만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바다다. ‘태평양의 장보고’는 잔잔한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며 숙명 같은 해일이 밀려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폭풍전야, 그리고 5월의 결심
1978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세계 해운업계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해상물동량은 북미항로에서만 40퍼센트 가까이 감소하는 등 불황은 1980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경쟁이 격심해지고 운임이 크게 하락해 대부분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해 항로에서 철수하거나 도산했다.
게다가 국제카르텔 Cartel격인 ‘해운동맹’이 해체되면서 해운시장이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4년 미국에서 신해운법이 발효되자 선사 간 동맹이 약화되고 동맹 안에서도 운임경쟁이 가능해져 저운임이 중요한 경쟁수단이 되었다. 저운임을 유지하면서 수지를 맞추려면 원가를 낮추어야 했다.
해운불황이 계속되면서 신해운법에 대응하지 못한 해운사들은 북미항로를 떠나야 했다. 국내 해운사들도 경영수지와 재무구조 악화로 일부가 도산했고, 나머지 도산도 시간문제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이른바 ‘해운산업합리화’를 단행해 100개가 넘는 해운사를 20개로 통폐합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국제해운이 도산했고, 대한선주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범양사건’까지 터져 국내 해운업계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했다.
한진해운은 외국과의 합작사라는 이유로 산업합리화 대상에서 제외되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86년 5월, 소공동 해운센터빌딩 집무실. 조중훈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해운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한진해운 때문이었다. 계열사별로 매월 올라오는 경영보고서가 한진해운에서만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한진해운은 자본잠식으로 채무초과 기업으로 전락했고 선박과 장비 구입으로 인한 부채는 상환능력을 넘어섰다. 대책이 없어 보고서 제출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중훈은 그룹경영조정실을 통해 독촉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해운자료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조중훈은 친분이 있는 도쿄은행 홍콩지점의 해운부장을 불렀다. 세계 해운업계를 꿰뚫고 있던 해운부장은 “한진해운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재건을 서둘러야 한다”고 권고했다. 조중훈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적자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할 때나 대진해운을 정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창업주만이 겪어야 하는 외로운 고뇌의 시간이었다. 한진해운이 좌초된다면 육해공 종합수송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물론, 해운왕이 되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도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조중훈은 이번 기회에 한진해운을 백지상태에서 재건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5월의 결심’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열흘 동안 그룹경영조정실을 중심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이 한진해운 본사를 실사했다. 적자를 본 외부 요인으로는 북미항로 전체의 선복량 선박의 적재능력 과잉에 따른 선복 이용률 하락과 가격경쟁으로 인한 수입단가 하락이, 내부 요인으로는 판매력 취약, 고원가 발생 구조에 따른 원가경쟁력 부족, 경비 절감 의식의 미흡, 조직의 취약, 인력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
조중훈은 미국 현지까지 실사하라고 지시했다. 한진해운의 경영상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입과 비용의 대부분이 발생하는 미주지역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조사단을 미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조중훈이 평소 품고 있던 문제의식도 반영되었다.
어느 해 조중훈은 미국 오클랜드 현장을 둘러보고 롱비치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변에 ‘한진해운’ 로고가 붙은 컨테이너를 보고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1년 후 다시 그곳을 지나는데 예의 컨테이너가 그대로 있었다. 일련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조회해 보라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담당자는 그 컨테이너가 요코하마에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한진해운 컨테이너는 2만 개가 넘었다. 미국에서는 컨테이너가 방치되고 있는데, 국내와 일본에서는 부족해 빌려 쓰고 있었다. 이런 기본적인 비용을 줄이지 않는 한 한진해운의 수지는 절대로 개선될 수 없음을 조중훈은 간파했다.
대한항공, ㈜한진, 한진해운 임직원으로 구성된 실사팀은 2주 넘게 미주 전역을 돌며 관리 실태를 조사했다. 조중훈은 두 달 동안 대한항공과 한진의 부문별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경영개선팀을 한진해운에 투입했다.
경영개선팀은 개선의 중점을 판매 증대와 원가경쟁력 강화에 두었다. 그 결과 석 달 만에 흑자로 전환되고 영업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경영개선팀은 수지가 개선되었으니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조중훈에겐 시작에 불과했다. ‘경영 개선’이 아니라 ‘기업 개혁’을 통한 창조적 파괴로 한진해운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목표였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적인 해운사로 거듭나겠다는 ‘5월의 결심’이 실행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해운사를 항공사처럼
조중훈은 한진해운의 조기 경영정상화를 위해 대한항공의 지원을 결정했다. 그것은 그룹 실무를 총괄하는 조양호 당시 수석부사장의 주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대한항공의 경영기법을 ‘어떻게 한진해운에 접목하느냐’였다. 대한항공의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개혁팀이 한진해운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조중훈은 시황이 호전되기만 기다리는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개혁팀이 투입되더라도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조중훈의 목표는 개선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개선은 기존 경영 기반에서 조직을 간소화하거나 인력과 비용을 줄이는 수준이지만, 개혁은 백지상태에서 재건하는 창조적 파괴를 의미했다.
대한항공도 한진해운과 같은 위기를 1970년대 중반에 겪었었다. 조중훈은 위기를 극복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거듭난 대한항공을 통해 어떻게 한진해운을 위기에서 구할지 잘 알고 있었다. 해운 경험이 없는 대한항공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컸지만 조중훈은 해운이나 항공이나 운영방법은 같다고 보았다. 그룹조회에서 조중훈이 말했다.
“한진그룹은 한진해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그룹의 힘으로 한진해운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조중훈은 한진해운에 ‘항공사식 경영’을 도입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경영기법을 접목한 것이다. 항공화물은 운항원가가 높아 경비절감으로 원가를 낮추는 노하우를 쌓아왔다. 조중훈은 그 노하우를 한진해운에 도입하기로 했다.
1986년 10월,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본사와 사무소를 해운센터빌딩에서 서소문 대한항공빌딩으로 이전했다. 선원과 현지인을 제외한 인력의 20퍼센트 이상을 대한항공을 비롯한 그룹 계열사로 보냈다. 그리고 대한항공 안에 해운조직을 신설했다. 운항 정시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합통제담당을 신설하고, 한진해운 미주지역의 관리기능을 대한항공과 통합해 영업과 운영 기능을 제외한 관리기능을 통합 운영했다. 항공화물과 해운화물의 화주가 같고 대부분 항공대리점이 해운대리점을 겸하고 있어 대한항공과 총판매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한진해운의 국내 영업을 대한항공이 전담하도록 했다. 이는 판매증대에 도움이 되었고 영업소 인건비와 운영비를 35퍼센트 이상 줄일 수 있었다. 매출도 1년새 1.5배 가까이 늘었다.
기존 배선방식도 선박과 기항지를 줄여 원가중심 스케줄로 바꾸었다. 컨테이너선의 운항은 갈 때와 올 때 한 번씩 두 번 기항했던 것을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주유운항’으로 바꾸어 중복기항을 피해 운항일수를 단축하고 선박 수도 감축했다. 항차별 소요일수도 42일에서 35일로 단축했다. 그 결과 빠르게 화물을 인도할 수 있어 서비스가 향상되고 연료비가 절감되어 월평균 38억 원 적자에서 1년새 10억 원대 흑자로 전환되었다.
조중훈은 항공수송의 생명인 정시성을 해운에도 적용했다. 전에는 해운사들이 예정보다 2~3일 늦어지는 것은 예사로 여기고 있었다. 조중훈은 대한항공이 100대가 넘는 항공기 운항을 24시간 감시해 정시운항 하도록 통제하는 시스템을 한진해운에 도입했다.
정시운항은 화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토요타자동차를 비롯해 국제분업생산을 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한진해운에 운송을 맡겼다. 한진해운은 1989년부터 7년 동안 정시율이 80퍼센트를 웃돌아 영국화주협의회로부터 정시성 부문 세계 최고 해운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한항공 전산실이 중심이 되어 화물수송에서 적용하던 최신 IT와 전산시스템을 응용해 1986년 한진해운의 온라인 실시간 전산시스템인 ‘한코스 HANCOS’도 개발했다. 그 결과 업무처리가 신속해져 업무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1987년 6월에는 국내 해운사 최초로 북미서안의 시애틀과 중부의 시카고, 동안의 뉴욕을 잇는 2단적열차 DST 서비스를 개시했다. 대륙횡단열차에 컨테이너를 2단으로 적재해 수송함으로써 미국 내륙수송비를 대폭 절감했다.
선박 정비에도 전산시스템이 도입되자 잔고장이 거의 없어졌다. 선박을 부두에 정박해놓고 정비하면 항해 중에 정비할 때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한진해운은 선박이 고장 나면 수리하던 것을 항공기의 예방정비방식으로 바꾸어 항해 중에 수리하도록 했다. 2만 개가 넘는 컨테이너와 5,000개가 넘는 섀시도 이동 상황을 파악해 컨테이너 회전율을 높이고 빈 컨테이너를 조기에 회수했다.
선원 이직을 줄이는 것도 급선무였다. 한번 배를 타고 나가면 집에 돌아올 날짜를 기약할 수 없어 몇 해 가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는 젊은 선원이 적지 않았다. 연간 선원 이직률이 20퍼센트에 달했다.
조중훈은 항공사식 승무원 교체 방식을 도입했다. 항공수송에서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원래 비행기를 조종해 온 기장이 다시 그 비행기를 몰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기다리던 다른 기장이 교대해 곧바로 승객을 태운 후 출발지로 돌아온다. 하루의 손실도 없이 인력과 비행기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여섯 달마다 선원들을 가까운 항구에 내려놓고 교대 인원을 항공편으로 현지에 파견해 예정된 날짜에 귀국할 수 있게 했다. 선박은 쉬는 일 없이 계속 운항할 수 있었고, 짜임새 있는 운항노선 배정으로 선박 운항 경비가 크게 줄어들었다. 새로운 선원 교체 방식이 도입되자 이직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해운업계 최초로 ‘가족동승제’도 실시했다. 거친 항해와 외로움에 시달리는 선원들에 대한 배려였다. ‘여자가 배에 타면 액운이 낀다’는 속설 때문에 여성 선원조차 뽑지 않던 시절에 가족동승제는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한진해운 선원들의 이직률은 더욱 낮아졌다.
한진해운은 기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대한항공의 경영기법을 접목해 단기간에 개혁을 이루어내 경쟁력 있는 글로벌 해운사로 재건되었다. 모두가 밤낮 없이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였다. 한진해운은 1987년 8월부터 독자 조직으로 환원되었고 1년 만에 위탁경영은 종료되었다. 한진해운은 대한항공의 적극적인 지원과 신속한 개혁으로 흑자전환되었다. 대한항공에 위탁했던 해운업무를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환원하고, 대한항공으로 전출되었던 해운 인원도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개혁에 참여했던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진해운으로 전출했으며 그 뒤로도 한진해운 성장에 기여했다.
재건된 한진해운은 창립 10년 만인 1987년 세계 15위 해운사로 발돋움했다. 기업재건을 시작한 지 2년 후 한진해운은 완전히 흑자로 돌아섰고, 3년 후엔 대한항공보다도 이익이 많아졌다. 기업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진해운을 세계적인 해운기업으로 재건해 육해공수송그룹을 구축하겠다는 조중훈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의 경영을 일정기간 대한항공에 위탁하는 방법을 제시한 조양호 당시 수석부사장의 추진력, 그리고 굳은 의지로 이에 동참한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임직원의 노력도 큰 몫을 했다.
조중훈은 원래 해운을 하고 싶었다. 항공공사를 맡아 달라는 정부의 요청이 없었다면 당연히 항공보다 해운을 먼저 했을 것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한 조중훈의 사업보국 의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복은 짓는 대로 받는 것이다. 적자투성이 항공사를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우면서 치러야 했던 엄청난 수업료와 피나는 노력은 그것만으로도 위대하지만, 해운의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부실 항공사를 인수할 때도, 실패를 딛고 해운사를 재건할 때도 모든 것을 끌어안았던 조중훈이 처음으로 칼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위험하다고 메스를 대지 않고 수술을 할 수는 없다. 대수술을 앞둔 외과의는 고독한 만큼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메스가 흔들리는 순간 살리려는 환자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중훈도 그랬다.
백지종군
한진해운의 경영이 정상화되기 시작한 1987년 새로운 어려움이 닥쳤다. 정부로부터 대한선주를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한진해운이 중병을 이겨내고 몸조리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중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한선주는 국내 최초의 국영기업이던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해 출발한 매머드급 해운사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해운 불황이 계속되면서 과당경쟁과 운임 하락의 악순환에 빠져 누적적자가 7,500억 원에 달했다. 국민당 부총재까지 지낸 윤석민 대한선주 회장은 “마지막으로 회사를 살려보겠다”며 국회의원직까지 내놓고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에
자금관리를 위탁했지만 두 달 만에 ‘회생불가’ 판정을 받았다.
대한선주를 부도처리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국의 대표 해운사인 대한선주가 도산할 경우 세계시장에서 신용을 잃어 대한민국 해운업계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하청업체의 연쇄도산, 금융권 연쇄부실화, 실업난도 우려되었다.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자 인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해운업계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매각 방침은 정해졌지만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곳이 없었다. 정부는 내심 한진해운이 맡아줄 것을 기대했다.
대한선주를 인수하는 것은 기름통을 끌어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차례에 걸친 검토 끝에 조중훈은 정부와 외환은행에
인수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재차 요청이 왔지만 역시 거절했다. 그러
자 정인용 당시 재무장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진해운, 외환은행, 재무부, 은행감독원 실무자들이 모인 가운데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 장관은 조중훈에게 대한선주 인수를 다시 요청했다. 이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수송그룹을 이끄는 조중훈으로서는 더 이상 타산을 따지며 정부와 업계의 고충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조중훈은 정 장관과 외환은행 측에 대한선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특별금융지원을 요청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대신 부채부담을 덜어
달라는 뜻이었다.
다시 마라톤회의가 열렸다. 정 장관은 “대한선주 인수로 떠안게 될 누적손실은 부실기업 정리 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원칙론을 고집했다. 정 장관이 대한선주 정리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날 아침, 조중훈은
정 장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백지종군의 심정으로 외환은행의 조건을 따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白衣從軍에 빗댄 ‘백지종군 白紙從軍’으로 외환은행이 제시한 대로 총부채 7,000억 원 중 4,000억 원을 떠안기로 한 것이다.
기업 이익보다 국익이 우선한다는 원칙으로 눈앞의 부채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투자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파격적인 수용이었다.
부실기업인 대한선주를 인수하게 된 것을 조중훈은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18년 전 항공공사를 인수했을 때의 심정이었다. 조중훈은 그간의
경험을 되새겼다. 국가산업의 동맥인 운송사업을 고집하며 대한항공을
키웠고, 한진해운을 설립하고 재건하지 않았던가. 대한선주를 재건하면
한진그룹의 육해공수송그룹으로서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인수가격이었다. 정 장관은 원칙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시가로 인수할 것을 권유했고 조중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무자들은 대한선주 같은 부실회사는 공짜로 주고 시드머니 종잣돈까지 주는 게 관례라며
펄쩍 뛰었지만 조중훈의 뜻을 꺾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고 당시 부실기업 정리와 관련한 청문회가 열렸고 한바탕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와중에도 대한선주만은 아무 말썽이 없었다.
조중훈이 손해를 감수하고 시가로 인수했기 때문이다.
정 장관이 아시아개발은행 ADB 부총재를 거쳐 홍콩에서 중책을 맡은 뒤
1997년 10년 만에 귀국했을 때 조중훈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연락했다.
대한선주 인수 얘기를 꺼내며 감사를 표하자 정 장관이 손사래를 쳤다.
“감사인사를 할 사람은 접니다. 대한선주 인수 후 한진을 세계적인 해운회사로 키우셨으니 그때 제 판단과 제가 취한 조치가 옳았음을 입증해주신 거니까요.”
조중훈은 정 장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항공 고문직을 맡겼다.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제안해준 것에 대한 보은이었다.
1988년 대한선주 당시 대한상선는 한진해운에 인수합병되었다. 한국 최대
해운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조중훈은 첫 조회에서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선주를 인수한 것은 노후 선박과 부채 등 유형자산을 인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해운을 이끌어왔던 직원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인수한 것입니다.”
인수 당시 대한선주가 보유한 선박은 국내에서 가장 많았지만 6년 이상 된 노후선박이 14척이나 되었다. 디젤엔진보다 연료소모량이 두 배
이상 많은 터빈선도 5척이나 되었다. 조중훈은 사업성이 없는 선박을 인수 당시 산정한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값으로 처분했다.
운항노선을 조정하고 물량 확보를 위해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한진해운은 대한선주와 합병 후에 국내 최대 해운기업의 위상에 걸맞게 1년 만에 독자적인 힘으로 기반을 다지고 경영능력을 키웠다. 그 후 지속적으로 선대를 확대하고 항로를 확장하면서 꾸준히 성장해 갔다.
이를 발판으로 유나이트 얼라이언스를 형성하고 세계 최대 2003년 당시인
CKYH얼라이언스를 결성해 세계해운을 선도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한선주는 한진해운뿐 아니라 조중훈의 경영항해에도 치명적인 암초가 될 수 있었다. 부실하기도 했지만, 인수과정에서 손실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만들어가는 혜안과 ‘지고 이기는’ 초연함으로 조중훈은 정치적 풍파를 피했을 뿐 아니라 한진해운을 세계적인 해운사로 키울 수 있었다.
조중훈은 해운사업에서도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 미국 항로 중에 서안항로가 있고 동안항로가 있는데 대한선주는 적자가 난다고 동안항로에서 철수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수출업체들이 미국 동부에도
가야 하는데 배가 없어 애를 먹었다. 조중훈은 적자가 나더라도 수출에
필요한 항로라며 동안항로를 다시 열었다. 조중훈은 세계적인 해운 불황에서도 바닷길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