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왕 꿈을 이루다

컨테이너의 매력

1966년 6월 어느 날. 조중훈은 베트남 퀴논항에서 미국 화물선의 하역을 지켜보며 넋을 잃었다. 눈앞에선 거대한 ‘갠트리 크레인’이 화물선에서 기관차만한 철제 궤짝을 하나씩 부두에 내려놓고 있었다.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40톤에 달했다. 그것을 배에서 부두로 옮기는 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열두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물량을 그 짧은 시간에 옮기다니!’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 속에 든 군수품은 따로 부리는 과정 없이 통째 트럭에 실려 부대를 향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중훈은 100개가 넘는 컨테이너가 다 내려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충격이었다.

컨테이너선의 출현은 범선의 바다에 증기선이 출현한 것에 맞먹는 해운의 혁명이었다. 컨테이너가 도입되기 전에는 잡화, 액체화물, 냉동화물 같은 여러 형태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도록 선박의 갑판을 이중으로 건조하고 화물의 특성에 맞춘 자체 하역장비까지 갖추어야 했다. 다양한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하역하는 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배 한 척에서 짐을 내리려면 꼬박 닷새는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방법을 모색하다 탄생한 것이 바로 컨테이너였다. 화물을 규격화된 컨테이너에 담아 야적장에 쌓아 두었다가 화물선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갠트리 크레인으로 신속하게 싣는 것이다.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 시스템을 갖춘 씨랜드는 하역비를 20분의 1로 줄이고, 정박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했다.

컨테이너는 다른 운송수단과도 효과적으로 연결되었다. 배에서 내린 화물을 곧바로 철도나 트럭으로 옮겨 실어 바닷길과 땅길을 하나로 잇는 해륙일관 海陸一貫 수송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컨테이너선은 건조비가 비쌀 뿐 아니라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전용터미널이 필요해 대규모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재래선은 ‘포트 투 포트 Port to Port, 항구에서 항구까지’ 서비스이지만, 컨테이너선 수송은 ‘도어 투 도어 Door to Door, 문에서 문까지’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육상수송체계도 겸비해야 했다.

경영자의 눈은 ‘발견의 눈’이다. 보는 것이 발견의 전부는 아니다. 퀴논항에서 컨테이너를 본 사람이 어디 조중훈뿐이었겠는가. 당시 국내 해운사들도 컨테이너의 존재와 위력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를 만들겠다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부러운 그림의 떡이었다. 조중훈은 같은 ‘그림의 떡’을 보고도 실제 사업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발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컨테이너라는 세계 해운 역사의 대발명 못지않은 경영자의 위대한 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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