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나라가 못하면 우리가 한다

1974년 5월 10일 인천항.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와 수만 인천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2도크 준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스위치를 누르자 1,200톤에 달하는 육중한 갑문이 열렸다. 대통령이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조수간만이라는 자연의 장애를 땀과 의지로 극복하고 대한민국 항만 역사에서 신기원을 이룩했다.”
인천항에는 제1도크가 있었지만 밀려드는 화물을 제때 내리지 못해 선박의 대기시간이 길어져 막대한 하역비가 들어갔다. 게다가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큰 배는 입항할 수도 없어 부산이나 다른 항구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하역해 육상을 통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인천이 서울과 가장 가까운 항구임에도 부두가 작아 지리적 이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엄청난 예산을 들여 부두를 증설하는 것은 정부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정부는 인천항 제2도크 축조에 필요한 조사를 마치고도 언제 착공할지 계획조차 못 잡고 있었다. 보다 못해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지역유지들이 당국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국회 건설분과위원회 의원들이 인천항을 둘러보게 되자 정부도 착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제2도크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5만 톤급 선박이 접안 할 수 있도록 확장할 것을 지시했고, 공사는 당초 계획과 달리 인천항 전체를 도크로 만드는 것으로 커졌다. 공사가 확장되면서 공사비도 크게 늘어났다. 하는 수 없이 민간자본으로 부두를 건설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한진과 대한통운에 투자를 권유했다.

정부의 투자 권유를 받았을 때 조중훈은 오히려 기뻤다. 베트남 퀴논항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처음 보고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을 결심한 그에게 항구는 꿈을 실현할 플랫폼이었기 때문이다. 갠트리 크레인이 화물선에서 집채만한 컨테이너를 부두 위에 내려놓으려면 그런 시스템을 갖춘 큰 부두가 필요했다. 사내에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간접자본 건설 비용을 기업에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고 수익성도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조중훈은 제 2도크 남부두 1,160미터 전체에 대한 투자 허가를 신청했다. 한진의 과감한 투자에 자극을 받았는지 주춤하던 대한통운도 시설투자 신청서를 제출했다. 건설부는 한진에 625미터를, 대한통운에 535미터를 각각 허가했다. 완공을 두 달 앞둔 1974년 3월 민자부두를 포함한 제2도크 전체에 대한 시운전이 실시되었다. 제2도크로 들어서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여수호’에는 조중훈이 베트남 퀴논항에서 보았던 갠트리 크레인이 두 대나 실려 있었다.

제2도크 건설을 통해 부산항으로 집중되던 물동량을 인천으로 유치해 불필요한 수송비를 줄일 수 있었다. 한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한 것이었고, 인천항의 현대화에 일조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

어떤 사업이든 20~30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조중훈이었다. 1969년 항공공사를 인수한 직후에도 김포공항의 열악한 시설부터 확충했다. 김포공항에 활주로가 처음 닦인 것은 1939년이었다. 당시 활주로 길이는 1,300미터에 불과했다. 이를 터전으로 1942년 김포비행장이 준공되었지만, 6.25 때 파괴되고 말았다. 1957년에야 보수공사를 해 아쉬운 대로 썼는데,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형편없었다. 낡은 격납고 1개 동이 전부였는데 중형 제트기 DC-9도 정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조중훈은 항공공사를 인수한 지 두 달 후, 항공기를 자체 정비할 수 있는 격납고를 짓기 시작해 1년 반 만에 완공했다.

국제선 청사도 조중훈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0년대 들어 국제선 여객이 늘어나고 외국 항공사의 서울 취항도 잇따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유치하게 되자 국제선 2청사 건립이 불가피해졌다.

이번에도 예산이 문제였다. 정부가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재원을 조달했지만 공사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대한항공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중훈은 청사와 계류장 확장 공사를 맡았고, 완공 후 정부에 기부했다. 나중에 화물청사 신축 등을 포함해 대한항공이 김포공항 시설을 확충하는 데 기부채납 한 돈은 340억 원이 넘는다.

항공공사를 인수할 당시에는 항공유를 저장할 시설도 없었다. 항공유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 저장시설은 필수였다. 조중훈은 항공공사를 인수한 이듬해 말 12만6,000갤런 용량의 저장탱크를 설치했다. 당시 대한항공의 하루 급유량은 3만 갤런 수준이었다. 이듬해에는 같은 규모의 저장시설이 증설되었다. 신기종 도입과 노선 확장으로 급유량이 늘어나자 21만 갤런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를 증설해 총 46만 갤런 이상의 저장능력을 확보했다.

1993년에는 인천 앞바다 율도에 초대형 비축기지와 1만 톤급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완공했다. 2년 동안 170억 원을 쏟아부은 공사였다. 1995년에는 5만 톤급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유류부두도 완공해 전천후 항공유 수급시스템을 갖추었다. 율도에는 바다 위에 건설된 해상도로가 있고 유류부두는 철구조물 위에 만들어져 있다. 유조선이 접안하면 항공유는 송유관을 따라 율도 항공유 비축기지로 흘러간다.

제주공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하는 데도 조중훈의 기여가 컸다. 제주공항은 활주로가 짧은데다 관제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기상상태가 나쁘면 이착륙이 어려워 결항이 잦았다. 신혼여행객들이 한번 발이 묶이면 예물반지를 팔아 숙박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조중훈은 관제시설 확충과 활주로 확장 공사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서울-제주 노선에 대형 항공기를 투입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제주공항은 오늘날 하루에 100회 넘게 이착륙이 이루어지는 국제공항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영종도 신공항 부지 선정에서도 조중훈의 혜안이 돋보였다. 당시 태안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었는데, 자문을 맡은 조중훈은 ‘태안불가론’을 주장했다. 태안은 섬이 아니고 육지여서

1980년대 김포공항.
-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
나중에 초음속항공기가 24시간 이착륙하게 되면 인근 주민들이 소음 때문에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서울과도 멀어 승객들이 불편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일본 나리타공항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공항은 육지가 아닌 섬에 건설해야 함을 역설했다. 영종도는 그런 고민 속에서 선택된 후보지였다.

대한민국 운수업 역사에서 조중훈의 선구자적 역할이 돋보이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국내 최초의 차량용 LPG충전소다. 1967년 서울 남영동에 자동차용 LPG충전소를 설치했는데, 아무도 무엇인지 몰랐을 정도로 생경했다. 당시 조중훈은 일본 택시들이 휘발유에 비해 값이 저렴한 LPG로 연료를 전환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도 머지않아 LPG차가 등장할 것을 예견했다. 당장은 수요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LPG충전소를 설치한 것이다. 설치 초기에는 LPG차가 없어 가정용 LPG를 충전하는 용도로 쓰였다. LPG차가 양산되고 보급된 것이 1980년 후반이었으니 조중훈의 안목은 20년을 내다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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