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못하면 우리가 한다
1974년 5월 10일 인천항.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와 수만 인천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2도크 준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스위치를 누르자 1,200톤에 달하는 육중한 갑문이 열렸다. 대통령이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조수간만이라는 자연의 장애를 땀과 의지로 극복하고 대한민국 항만 역사에서 신기원을 이룩했다.”
인천항에는 제1도크가 있었지만 밀려드는 화물을 제때 내리지 못해 선박의 대기시간이 길어져 막대한 하역비가 들어갔다. 게다가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큰 배는 입항할 수도 없어 부산이나 다른 항구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하역해 육상을 통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인천이 서울과 가장 가까운 항구임에도 부두가 작아 지리적 이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엄청난 예산을 들여 부두를 증설하는 것은 정부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정부는 인천항 제2도크 축조에 필요한 조사를 마치고도 언제 착공할지 계획조차 못 잡고 있었다. 보다 못해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지역유지들이 당국에 건의서를 제출하고 국회 건설분과위원회 의원들이 인천항을 둘러보게 되자 정부도 착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제2도크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5만 톤급 선박이 접안 할 수 있도록 확장할 것을 지시했고, 공사는 당초 계획과 달리 인천항 전체를 도크로 만드는 것으로 커졌다. 공사가 확장되면서 공사비도 크게 늘어났다. 하는 수 없이 민간자본으로 부두를 건설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한진과 대한통운에 투자를 권유했다.
정부의 투자 권유를 받았을 때 조중훈은 오히려 기뻤다. 베트남 퀴논항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처음 보고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을 결심한 그에게 항구는 꿈을 실현할 플랫폼이었기 때문이다. 갠트리 크레인이 화물선에서 집채만한 컨테이너를 부두 위에 내려놓으려면 그런 시스템을 갖춘 큰 부두가 필요했다. 사내에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간접자본 건설 비용을 기업에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고 수익성도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조중훈은 제 2도크 남부두 1,160미터 전체에 대한 투자 허가를 신청했다. 한진의 과감한 투자에 자극을 받았는지 주춤하던 대한통운도 시설투자 신청서를 제출했다. 건설부는 한진에 625미터를, 대한통운에 535미터를 각각 허가했다. 완공을 두 달 앞둔 1974년 3월 민자부두를 포함한 제2도크 전체에 대한 시운전이 실시되었다. 제2도크로 들어서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여수호’에는 조중훈이 베트남 퀴논항에서 보았던 갠트리 크레인이 두 대나 실려 있었다.
제2도크 건설을 통해 부산항으로 집중되던 물동량을 인천으로 유치해 불필요한 수송비를 줄일 수 있었다. 한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한 것이었고, 인천항의 현대화에 일조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
어떤 사업이든 20~30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조중훈이었다. 1969년 항공공사를 인수한 직후에도 김포공항의 열악한 시설부터 확충했다. 김포공항에 활주로가 처음 닦인 것은 1939년이었다. 당시 활주로 길이는 1,300미터에 불과했다. 이를 터전으로 1942년 김포비행장이 준공되었지만, 6.25 때 파괴되고 말았다. 1957년에야 보수공사를 해 아쉬운 대로 썼는데,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형편없었다. 낡은 격납고 1개 동이 전부였는데 중형 제트기 DC-9도 정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조중훈은 항공공사를 인수한 지 두 달 후, 항공기를 자체 정비할 수 있는 격납고를 짓기 시작해 1년 반 만에 완공했다.
국제선 청사도 조중훈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0년대 들어 국제선 여객이 늘어나고 외국 항공사의 서울 취항도 잇따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유치하게 되자 국제선 2청사 건립이 불가피해졌다.
이번에도 예산이 문제였다. 정부가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재원을 조달했지만 공사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대한항공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중훈은 청사와 계류장 확장 공사를 맡았고, 완공 후 정부에 기부했다. 나중에 화물청사 신축 등을 포함해 대한항공이 김포공항 시설을 확충하는 데 기부채납 한 돈은 340억 원이 넘는다.
항공공사를 인수할 당시에는 항공유를 저장할 시설도 없었다. 항공유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 저장시설은 필수였다. 조중훈은 항공공사를 인수한 이듬해 말 12만6,000갤런 용량의 저장탱크를 설치했다. 당시 대한항공의 하루 급유량은 3만 갤런 수준이었다. 이듬해에는 같은 규모의 저장시설이 증설되었다. 신기종 도입과 노선 확장으로 급유량이 늘어나자 21만 갤런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를 증설해 총 46만 갤런 이상의 저장능력을 확보했다.
1993년에는 인천 앞바다 율도에 초대형 비축기지와 1만 톤급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완공했다. 2년 동안 170억 원을 쏟아부은 공사였다. 1995년에는 5만 톤급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유류부두도 완공해 전천후 항공유 수급시스템을 갖추었다. 율도에는 바다 위에 건설된 해상도로가 있고 유류부두는 철구조물 위에 만들어져 있다. 유조선이 접안하면 항공유는 송유관을 따라 율도 항공유 비축기지로 흘러간다.
제주공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하는 데도 조중훈의 기여가 컸다. 제주공항은 활주로가 짧은데다 관제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기상상태가 나쁘면 이착륙이 어려워 결항이 잦았다. 신혼여행객들이 한번 발이 묶이면 예물반지를 팔아 숙박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조중훈은 관제시설 확충과 활주로 확장 공사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서울-제주 노선에 대형 항공기를 투입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제주공항은 오늘날 하루에 100회 넘게 이착륙이 이루어지는 국제공항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영종도 신공항 부지 선정에서도 조중훈의 혜안이 돋보였다. 당시 태안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었는데, 자문을
맡은 조중훈은 ‘태안불가론’을 주장했다. 태안은 섬이 아니고 육지여서
1980년대 김포공항.
-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
나중에 초음속항공기가 24시간 이착륙하게 되면 인근 주민들이 소음 때문에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서울과도 멀어 승객들이 불편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일본 나리타공항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공항은 육지가 아닌 섬에 건설해야 함을 역설했다. 영종도는 그런 고민 속에서 선택된 후보지였다.
대한민국 운수업 역사에서 조중훈의 선구자적 역할이 돋보이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국내 최초의 차량용 LPG충전소다. 1967년 서울 남영동에 자동차용 LPG충전소를 설치했는데, 아무도 무엇인지 몰랐을 정도로 생경했다. 당시 조중훈은 일본 택시들이 휘발유에 비해 값이 저렴한 LPG로 연료를 전환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도 머지않아 LPG차가 등장할 것을 예견했다. 당장은 수요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LPG충전소를 설치한 것이다. 설치 초기에는 LPG차가 없어 가정용 LPG를 충전하는 용도로 쓰였다. LPG차가 양산되고 보급된 것이 1980년 후반이었으니 조중훈의 안목은 20년을 내다본 셈이다.
사막의 검은 선
베트남사업을 발판으로 한진은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당시 대기업들은 대부분 성장 기반을 국내에 두고 있었지만 한진은 해외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수송외길을 걸으려고 해도 당시 국내 기간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어서 사옥도 지어야 했고 버스가 달리려면 길도 닦아야 했으며 배가 들어오게 하려면 부두도 만들어야 했다. 건설과 토목은 수송외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업이다.
1968년 설립된 한일개발은 그런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 조중훈은 건축과 토목에서도 실험정신으로 도전했다. 남대문로 2가에 그룹 사옥으로 쓸 빌딩을 당시로서는 초고층인 26층으로 지으면서 철강재로 뼈대를 만들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철골빌딩 건설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빌딩은 한동안 해운센터빌딩으로 쓰이다가 한진해운이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다시 한진빌딩으로 바뀌었다. 이후에도 한일개발은 그룹 내 각종 건물 공사를 맡아 기술을 쌓아갔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건설경기가 활발해지고 부동산개발 붐이 일자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설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조중훈은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건설업으로 돈을 벌겠다고 한일개발을 설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업인 수송을 제대로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일하려는 한일개발 직원들이 그냥 손을 놓고 있게 할 수도 없었다. 조중훈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기왕 건설과 토목을 하려면 나라밖에서 기반을 다지겠다고 각오했다.
한일개발이 해외에서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1차 쇼크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오일쇼크의 회오리 속에서도 조중훈은 돌파구를 찾아냈다. 세계 경제는 얼어붙었지만 오일머니가 중동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중동 산유국들은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달러로 군비를 확충하고 경제를 부흥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중훈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오일쇼크의 진원지인 중동으로 들어가 공사를 수주하겠다는 역발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조중훈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열사의 땅에서 아랍의 왕족들을 상대로 공사를 따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거래를 알선해 주겠다며 접근해오는 중개업자들 중에는 국제사기꾼도 적지 않았다. 조중훈은 가급적 직접 접촉하는 쪽을 택했다. 사막을 횡단하며 중동 왕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사막의 밤하늘에 칼처럼 떠 있는 초승달 아래서 아랍 서적을 섭렵하며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화법을 연구했다.
마침내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처럼 기회가 왔다. 홍해 연안의 움라지 고속도로 공사를 600만 달러에 수주한 것이다. 한국기업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75년 5월 조중훈은 프랑스 툴루즈에서 대한항공이 발주한 에어버스 항공기 제작 진행 상황을 살펴본 후 사우디로 날아갔다. 움라지 공사 현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사우디에 도착한 조중훈은 직원용 숙소에 짐을 풀었다. 직원들과 함께 지내며 현지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중동의 모래바람은 거셌다. 서부 도시 제다에서 지프를 타고 하룻밤을 꼬박 달려서야 움라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막을 뚫고 도착한 현장은 예상보다 훨씬 열악했다. 자연환경도 그랬지만 그곳 인심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감독관으로 파견된 파키스탄인들은 ‘갑’ 행세를 하며 한일개발 근로자들을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중훈은 감독관들에게 대한항공의 점보기 홍보물을 보여주며 “대한항공이 머지않아 파키스탄에 취항하면 당신과 당신 가족을 초청해 탑승하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이 파키스탄에 직항노선을 개척하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지만, 조중훈은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 그것은 한일개발 근로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정중한 경고였다.
근로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해주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국외로 돈을 가져가는 것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어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개척자는 늘 외롭고 고달프다는 것을 조중훈은 통감했다. 한일개발은 그렇게 사막의 폭풍을 맨 앞에서 다 맞으며 한 걸음씩 전진했다.
근로자들은 고군분투했지만, 한일개발은 움라지 고속도로 공사에서 큰 손해를 입어야 했다. 오일쇼크로 원자재 가격이 3배 가까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막대한 손해를 볼 것이 뻔했지만 조중훈은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손해를 줄이기 위해 부실공사를 하는 일도 없도록 했다. 손실을 입더라도 중동의 한국 업체에 대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일개발의 이런 노력은 훗날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중동 건설사업을 수주하는 데 신용의 밑거름이 되었다.
1976년 움라지 건설현장을 다시 찾은 조중훈은 끝없는 사막을 뚫고 힘차게 뻗은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북받쳐 오르는 뿌듯함을 한편의 시로 읊었다.
새파란 홍해 잔잔한 바다에 무심한 아라비아의 보름달
스산한 사우디 사막 위를 우리 고향같이 교교히 비추어준다.
달빛 아래 한국의 나그네들
움라지의 개척자들
땅과 모래바람에서 무쇠 의지로
홍해 옆 사막에 검은 선을 긋는다
아롱거리는 검은 빛 끝없는 신작로
아라비아의 황야에 뻗은
청과 흑의 하모니
알라신 후예들의 동맥을 잇는다
홍해, 너는 본다
기나긴 87킬로미터의 하이웨이
머지않아 유색, 무색의 군상들이
그리고 낙타와 양떼들이
달리며 넘어갈 날을
세계의 모든 달리는 틀을 잘 모실 것이다
또한 한국의 얼이 길-게 뻗칠 것이다
조중훈이 지은 시는 후발주자들에게 이정표가 되었고, 그가 모래바람과 맞서며 무쇠 의지로 사막에 그린 검은 선은 이후 한국 건설사들의 진출을 돕는 가이드 라인이 되었다.
베트남 전장에서, 태평양에서, 세계 곳곳에서 불가능이 없음을 경험한 조중훈에게 ‘아는’ 사업에 관한 한 불모지는 없었다. 그는 사업가라기보다 개척자였다. 슘페터가 말하는 진정한 기업인으로서 개척과 혁신을 넘나드는 경영자였다.
조선은 아는 사업이다
“일본에서 고장력강이란 신소재를 개발했다는데, 그걸로 컨테이너선을 건조하면 좋을 것 같아.”
1984년 10월 어느 날, 한진해운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조중훈의 난데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해운사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이었지만 고장력강 高張力鋼이란 소재는 금시초문이었다. 조중훈은 고장력강으로 배를 만들면 선체 두께를 5밀리미터나 줄이면서 강도를 유지할 수 있고, 화물 적재량은 30퍼센트나 늘릴 수 있다고 계산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 습관이 몸에 밴 조중훈은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관련서적부터 탐독했다. 1977년 한진해운을 설립한 이후에는 조선기술 서적이 서재에 쌓였고, ‘고장력강’은 일본의 최신 서적에서 찾아낸 보물이었다.
대한항공 인수 초기 오일쇼크로 연료를 구할 수 없어 천신만고 끝에 개척한 태평양노선에 비행기를 띄울 수 없었던 조중훈은 이후 기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항공기의 외장 페인트까지 벗겨내는 아이디어를 냈다. 항공기의 무게가 줄어들수록 적재율이 높아지고 원료비가 절감되는 원리를 화물선에 적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강도는 유지하면서 강판 두께를 얇게 해 무게를 줄여 배가 더 잘 나가게 만든다는 건 당시 조선기술자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항공사가 위기에서 살아남아 성장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해운사도 위기를 뚫고 지속성장하기 위해서는 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조중훈은 생각했다. 수송은 끊임없이 길을 개척하면서 수송수단을 잘 정비하고 혁신해야 한다. 조중훈이 항공에서 점보기를 도입하고 해운에서 컨테이너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조중훈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 터득한 지식으로 신소재를 도입해 적재율을 높이고 원가를 절감하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조중훈은 일본 히타치조선에 고장력강으로 최신형 컨테이너선을 건조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고장력강을 개발한 일본에서도 이론만 있을 뿐 이 소재로 배를 만든 선례가 없었다. 조중훈은 어떻게 해서든 고장력강으로 배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이를 면밀히 검토한 히타치조선은 건조에 착수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86년 일본 히타치조선소에서 위용을 드러낸 ‘한진뉴욕호’의 최대 속력은 당시 최고 수준인 24노트에 달했다. 화물적재량 대비 연료 소모량도 기존 화물선에 비해 획기적으로 줄었다. 조선업계는 기존 선박에 비해 무게는 10퍼센트 이상 가볍고, 적재율은 30퍼센트 이상 높은 신 新경제선의 등장에 경탄했다. 고정관념을 깬 조중훈의 새로운 사고가 한국의 조선사 史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조중훈은 고장력강으로 선박을 설계하는 기술을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사에도 전수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 최초로 고장력강 컨테이너선을 건조하는 데 성공한 조중훈은 선박 건조에 자신감을 얻어 조선업 진출을 본격 검토했다. 모르는 사업에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수송외길을 고집했던 조중훈이지만 조선업은 달랐다. 청년 시절 대부분을 진해 해원양성소와 일본 고베조선소에서 보냈기에 배에 관해서라면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조선은 ‘아는’ 사업이었다.
한진해운은 보유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소를 설립해야 했다. 한진해운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물선 수요가 늘고 있었고, 보유 선박의 수리 물량도 적지 않았다. 특히 대한선주가 보유하고 있던 선박들은 10년이 넘은 중고선이 태반이어서 조선소는 절실했다.
한진해운을 경영하면서 조중훈은 조선업을 병행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해외 선진 해운사들도 필요한 선박을 직접 건조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시절이었다. 조선업 진출을 고민하던 그때 나타난 것이 조선공사다.
당시 해운.조선 경기는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조선공사는 직원 수만 3,300명에 달하는 데다 조선업계에 불어닥친 불황으로 수지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르웨이로부터 수주한 다목적선 6척을 건조하고도 인수를 거절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1987년 조선공사의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은 자산 실사와 여신 분담에 착수했다. 채권단은 공개경쟁입찰로 제3자 인수를 추진했지만 부실투성이 조선공사의 입찰에 참여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조중훈은 기왕에 조선소를 만들 거라면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 기업을 인수해 되살려보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입찰가격이 862억 원에 달해 무리가 되긴 했지만, 그룹이 보유한 선박의 자체수리 물량도 적지 않았으므로 수익성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1차 입찰에서 신청서를 제출한 동부그룹은 몇 시간 만에 참여를 철회했고, 3차 입찰에서는 쌍용그룹이 설명회까지 참석하며 관심을 보이다가 결국 포기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기업은 한진과 진로뿐이었다. 중공업 진출을 모색하던 진로는 조선공사를 인수하기 위해 1년 반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해왔었다.
조중훈은 수지를 충분히 맞출 수 있다고 자신했다.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한진은 제조업에는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업과 밀접한 해운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항공부품 생산을 통해 제조업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대한선주를 인수하고 성공적으로 경영을 정상화하면서 기업 인수합병 M&A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마침내 조선공사를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이 출범했다. 일본 고베조선소에서 주경야독하며 해운왕을 꿈꾸었던 청년이 마침내 거대 조선사의 주인이 된 것이다. 사업장이 있는 부산 영도조선소로 향하는 조중훈의 가슴에는 감동이 북받쳤다. 그러나 조선소 정문에서 그를 맞은 것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2,000여 명의 노조원이었다. 조선공사는 한국의 노조 발상지나 마찬가지였고, 노조는 회사가 2년 넘게 주인 없이 떠도는 과정에서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노조는 조중훈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나왔다. 경영정상화보다 시급한 과제가 노사화합이라는 것을 조중훈은 통감했다. 한진중공업이라는 한 배를 탄 이상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노사분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조중훈은 앞을 막아선 노조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3년치 작업 물량을 확보한다.’
‘월급이 밀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심각한 경영난을 타개하려면 인력감축이 불가피했지만 조중훈은 구조조정 대신 임금을 제때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노조원들은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은 그렇게 무거운 닻을 올렸다. 조중훈은 노사간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복리후생과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직원들의 편의시설부터 정비했다. 사업장 내 직원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다 개인용 라커가 형편없이 낡은 것을 보고 즉각 교체해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수시로 조선소 작업현장을 돌며 업무환경도 직접 살폈다. 직원들의 마음의 벽부터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장을 둘러보던 중 컴퓨터 방식의 철판 절단기를 도입하면 작업 능률이 크게 높아질 것이란 아이디어를 내 조선소에 설치하기도 했다.
시설뿐 아니라 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의 해외기술 연수와 견학을 추진하고,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사내에 산업대학도 개설했다.
LNG선의 비밀
조선공사 인수 직후 강성노조를 품어 안으며 한 배를 탄 심정으로 닻을 올리기는 했지만, 3년치 작업물량을 확보하고 임금이 절대 밀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풍보다는 역풍이 많았다. 기존 방식으로 배를 만들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조중훈은 한진중공업의 활로를 찾아 밤낮없이 고심하고 뛰어다녔다.
1990년 조중훈은 ‘한진카오슝호’를 진수한 후 첨단기술 도입에 착수했다. 당시 세계 조선업계의 화두는 차세대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꼽히는 LNG 액화천연가스운반선이었다. LNG선은 모스형과 멤브레인형 두 종류였다. 모스형은 갑판 위에 둥근 화물탱크를 설치한 데 반해 멤브레인형은 선박 내부를 5각형으로 만들고 선체에 직접 방열자재를 설치해 탱크를 만드는 것으로 LNG탱크가 선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멤브레인’은 ‘두께가 얇은 막’이라는 뜻으로 단열재의 두께가 기존 LNG선의 절반에 불과해 더 많은 LNG를 운송할 수 있었다. LNG를 극저온으로 얼려 운반할 수 있고 바람의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어 운항성능도 뛰어났다. 대형선박을 만드는 데 유리하지만, 고난도 용접기술이 있어야 제작할 수 있었다.
조중훈은 멤브레인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멤브레인형 LNG선 건조기술은 프랑스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경쟁 조선소에 앞서 프랑스 조선사와 LNG선 건조에 필요한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해놓았지만, 더는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경쟁사에 핵심기술을 순순히 이전해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중훈은 직접 부딪쳐보기로 하고 프랑스로 날아갔다.
조중훈은 프랑스 조선회사 사장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했고, 통역도 대동하지 않은 채 사장실에서 일대일 협상을 진행했다. 조중훈은 불어가 유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기다리는 임원들은 행여 난감한 상황이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애를 태우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는 건지,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회의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조중훈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왔다. 다들 어리둥절했다.
협상 30분 만에 한진중공업에 멤브레인형 LNG선 건조기술을 모두 이전해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낸 것이다. 회의실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나중에 밝혀진 협상 뒷이야기는 이렇다.
1973년 프랑스 정부의 부탁을 받고 에어버스 항공기 6대를 구매하면서 프랑스 고위 당국자들을 알게 된 조중훈은 피에르 베레고부아 당시 프랑스 총리에게 미리 협조를 요청해두었다. 20년 전 대한항공의 호의를 잊지 않고 있던 총리는 조중훈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사 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했다. 30분의 담판 뒤에는 20년 전 조중훈이 뿌려놓은 신뢰의 씨앗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1992년 한국 최초로 멤브레인형 LNG선을 수주해 3년 후 아시아 최초로 자체 건조한 LNG선을 인도했다. 악화일로에 있던 경영수지와 계속되는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던 한진중공업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이어 첨단 전동차 등 철도차량의 양산체제를 구축했고, 항만운송기기까지 만들어내면서 종합물류기기 제조사로 발전해 나갔다. 조중훈은 LNG선 건조기술 역시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 국내 경쟁사에 전해주어 국내 조선기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지금은 조중훈이 도입한 멤브레인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재 한진중공업은 LNG선과 중대형 컨테이너선, 화학제품 운반선, 냉동선, 케이블선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조선뿐 아니라 건설, 플랜트 등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중공업회사로 성장했다. 한진중공업의 정상화로 항공공사와 대한선주, 조선공사로 이어진 조중훈의 부실기업 정상화 프로젝트도 큰 매듭을 짓게 되었다.
1996년 한진중공업의 도약과 더불어 한진그룹은 ㈜한진과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중공업을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의 큰 틀을 갖추며 재계 7위로 성큼 올라섰다.
돌밭에 일군 열정의 목장
제주공항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제1횡단도로. 한라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제동목장은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목장 입구에는 도로 양쪽으로 키 작은 편백나무와 키 큰 삼나무가 반듯하게 줄지어 늘어섰고,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초원은 한가롭기만 하다. 460만 평에 달하는 제동목장은 제주도 면적의 0.9퍼센트를 차지한다. 3만 평 단위로 구획된 초지가 60개가 넘고, 맑은 날에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다. 제주의 명소인 산굼부리도 그 안에 있다.
조중훈은 이 목장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목장을 개간한 이래 병상에 눕기 전까지 30년 동안 목장을 가꾸었다. 그가 제주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 3월 대한항공을 출범시키면서다.
당시 제주도는 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라 여행객도 많지 않았고,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뱃길을 이용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한 뒤 조중훈은 제주노선에 항공기를 집중 투입했다. 제주도가 가진 관광자원에 대한 투자였다. 항공편이 늘어나자 경주와 온천 지역을 찾던 신혼여행객들이 제주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조중훈은 매물로 나온 한라산 기슭의 황무지를 매입했다. 흥한방적과 화신백화점을 운영하던 박흥식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땅이었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에 이 황무지를 불하받아 활주로를 닦고 조종사 훈련장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조중훈이 매입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조중훈이 이 황무지에 마음을 둔 것은 두 가지 꿈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 역시 점보기 이착륙이 가능한 조종사 훈련장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현대화된 대규모 목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장은 기존 사업과도 시너지효과가 있었다. 정상궤도에 오른 대한항공의 기내식에 양질의 고기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정부에서도 ‘축산입국’을 내걸고 축산업을 장려하고 있었다. 낙농업이 농가의 부업 수준에 머물러 있던 시절, 정부는 ‘축산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초지법을 제정해 대단위 기업목장제도를 도입, 대기업의 자본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전국 각지에서 목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경춘가도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목장’ 푯말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찾아가 보면 젖소나 한두 마리 매어놓고 목장이라 하는 데가 허다했다. 이러한 실상을 본 조중훈은 제주도에 매입한 황무지를 최신 기계화를 통한 현대적 시설의 대단위 기업형 목장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1972년 제동흥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동목장은 훗날 제주도 최대 목장으로 성장했다.
조중훈이 매입한 황무지는 한라산 동쪽 해발 400미터에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강우량이 많고 일조시간이 짧은 결점은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목장으로 개발하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역사적으로도 조선 후기에 설치되었던 산마장 山馬場 중 최대 규모였던 녹산장 鹿山場 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무지는 황무지였다.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길은 고사하고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도 그 지역으로는 딸을 시집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조중훈이 이 땅을 답사할 때도 헬리콥터를 타고 가야 했다.
조중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각오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국토를 개간해 한 평의 쓸모 있는 땅이라도 조국에 바친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개간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당시 제주에서는 굴착기도 구할 수 없었다. 그룹 계열사인 한일개발에서 중장비를 들여왔지만, 정작 중장비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한라산 제1횡단도로 5.16도로에서 목장에 이르는 9킬로미터의 진입로부터 뚫어야 했다.
그런 다음 목초를 확보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했다. 산과 하천과 계곡을 제외한 모든 땅을 초지로 바꾸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중훈은 주말마다 제주로 내려가 인부들의 거처로 마련한 임시 숙소에서 지내며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말이 황무지이지 돌밭에 가까웠다. 돌을 덜어내면 그 밑에 또 돌이 있었다. 종일 돌을 파내도 한 사람이 한 평 일구기가 어려웠다.
460만 평을 개간하는 데 대형 굴삭기와 트랙터 30대를 비롯해 연간 트럭 3만 대, 인력 5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황무지에서 캐낸 엄청난 양의 돌을 치우는 것도 문제였다. 조중훈은 장비를 가져와 돌을 부수라고 지시했다. 잘게 부숴진 돌은 목장 내 도로를 닦는 골재로 썼다.
당장 전기와 통신도 문제였다. 조중훈은 대한항공에서 사용하던 무선통신 장비를 가져와 비상연락망을 설치했다. 무전기를 들고 교신하는 모습을 본 마을주민들이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통신은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전기 공급이 쉽지 않았다. 조중훈은 고심 끝에 풍차를 만들어 돌리기로 했다. 국내 최초로 3킬로와트짜리 풍력발전기 5대를 설치해 전기를 만들어 썼다. 이 풍차는 1982년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목장을 밝혔다.
1973년 초부터 시작된 개간으로 그해 말까지 15만 평이 넘는 초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축사를 짓고 미국에서 애버딘 앵거스 260마리를 들여오고 이듬해에는 육우인 샤로레 155마리도 추가로 들여왔다. 둘 다 육질이 좋기로 소문난 품종이었다. 새끼를 치면서 이듬해에는 181마리가 늘어났다. 처음 새끼를 낳을 때는 조중훈도 수의사와 함께 어미소 곁을 지켰고, 이후에도 한동안 새끼를 낳을 때마다 보고를 받았다. 어미소가 새끼를 낳다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안쓰러워하며 대책을 마련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외래소들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폭설이 내린 어느 해 겨울에는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넓은 눈밭을 헤치며 찾아다녔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곳을 파헤쳐 보니 골짜기 속에 옹기종기 서로 의지하며 숨어 있었다.
한번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소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조그만 상처라도 나면 지혈이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원인을 알아봤더니 고사리중독증이었다. 앵거스는 식성이 좋은 소로 새파란 것은 모조리 먹어치우는데, 제주에 지천인 고사리를 뜯어먹은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고사리중독증에 관한 보고가 없어 일본에서 약을 구해 와 치료했다. 나중에 서울대와 함께 고사리중독증을 연구해 학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외국인 수의사를 고용해 예방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어느 해 여름에는 진드기로 인해 전염되는 피로플라스마가 돌아 소들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조중훈은 해외 사례를 섭렵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해결책을 찾아냈다. 소의 키만큼 통로를 판 다음 물을 가두고 소독약을 풀어 소들이 차례로 헤엄쳐 건너가도록 한 것이다. 해마다 각종 질병이 목장을 위협했지만 그때마다 조중훈의 노력으로 소들을 지킬 수 있었다.
조중훈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늘 그랬듯이 제동목장을 키우면서도 품종별 소의 특성과 질병은 물론 사료용 목초까지 연구했고, 제주 풍토에 맞는 옥수수 종자 사료용를 개발하기도 했다. 한번은 조중훈이 수의사에게 어느 소가 제동목장의 우두머리인지 물었다. 수의사가 대답을 못하자 조중훈은 우두머리가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 했다. 수의사가 관찰을 거듭해 우두머리를 찾아내고 나니 그 후로 관리가 쉬워졌다. 초지를 옮길 때마다 우두머리를 유도하자 다른 소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다.
소에 대한 조중훈의 관심과 애정은 유별났다. 목장 곳곳에 나무를 심어 휴식처를 만들었고, 소에게 먹일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도 조중훈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제동목장의 강수량은 육지의 두 배에 달했지만 화산암지대여서 빗물이 곧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조중훈은 저수지를 판 다음 일본에서 들여온 고무매트를 깔아 20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지를 4개나 만들었다. 가뭄 때는 급수차를 동원해 인근 마을의 소들에게도 물을 공급해 주었다. 항공과 해운에서처럼 제동목장에도 전산시스템을 도입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목장을 운용하도록 했다.
조중훈은 수의사들에게 제동목장의 소들만 보살피지 말고, 수의사가 없는 이웃 목장과 인근 마을에 있는 소와 말도 함께 살펴보라고 했다. 제동목장의 소는 해마다 늘어나 1986년에는 3,000마리를 넘어섰다. 하지만 조중훈이 쏟은 정성과 초지를 가꾸기 위해 들인 투자에 비해 제동목장의 수입은 너무나 초라했다. 소 값이 치솟았던 1983년을 제외하면 늘 적자였다. 적자가 난다고 목장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는 일은 없었다. 목축업으로 이익을 보려했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모든 사업을 예술로 생각했던 조중훈에게는 제동목장도 예술작품이었다. 목장 관리자들에게도 언제나 목장일을 작품 활동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 결과, 제동목장은 정부로부터 ‘대규모 목장’으로 승인을 받고, 축산진흥 공로로 농수산부장관 표창까지 받았다. 조중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중훈이 제동목장에서 이룬 또 하나의 기록적인 사업이 있다. 바로 국내 최초로 먹는 샘물을 개발한 것이다. 대한항공이 제주도에 취항한 이래 신혼여행객을 비롯한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숙박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칼 KAL호텔’도 그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문제는 호텔에서 사용할 식수가 부족한 것이었다. 조중훈은 육지에서 시추기와 착정기를 끌고 와 지하수를 파 제주 역사상 최초로 암반수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서귀포로 착정기를 옮겼다가 제동목장 부지에서 샘물을 뽑아내게 되었다.
제동목장에서 뽑아올린 물을 먹는 샘물로 가공하기 위해 조중훈은 프랑스 에비앙과 기술제휴를 추진했다.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에비앙도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에비앙에 버금가는 수질과 물맛을 인정했다. 이번에는 거꾸로 에비앙 쪽에서 합작으로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조중훈은 물을 파는 일은 본업이 아니라며 기술만 제휴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 최초의 먹는 샘물이 탄생했다. 호텔 식수와 기내식에 쓰기 위해 시판 허가를 받았는데, 지역주민들의 오해로 여론이 좋지 않았다. 한진이 물을 다 뽑아내 제주도 지반이 약해진다는 낭설이 돌기도 했다. 과학적인 조사로 그런 우려가 사실무근임이 입증되었다.
목장이 자리를 잡고 그 안에 비행훈련원을 지어 교육체계를 갖추고 있던 1990년 5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부가 재벌의 부동산투기 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 제동목장을 매각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황무지를 개간해 20년 넘게 목장을 가꾼 것이 부동산투기라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런 오해를 낳게 된 것일까.
수익이 나지 않는 목장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른 계열사와의 합병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제동흥산 제동목장을 그룹 계열사인 평해광업개발과 합병했다. 평해광산은 석회석을 캐 당시 포항제철 지금의 포스코에 공급하고 있었는데, 평해광산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로 목장의 적자를 메워가며 가까스로 운영할 수 있었다. 그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당국이 제동목장을 평해광산의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해버린 것이다. 광산업과 무관한 목장을 수익이 나지 않는데도 운영하는 것은 투기 목적이라는,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조중훈은 자료를 갖추어 제동목장을 조성한 동기와 과정을 설명했지만 당국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황무지에서 돌을 파내고 파내 한 뼘씩 개간한 것도, 고사리중독증에 걸린 소들을 살리려고 동분서주한 것도 한낱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부동산이 아니라 피땀으로 일군 땅이었지만 더는 미련도 없었다. 다만 그 땅이 마구 나뉘어 가치 없는 토지로 전락하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치 있게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조중훈은 매각 대신 기부를 선택했다. 장학재단을 설립해 390만 평을 기부하고, 황무지를 개간할 때 도움을 주었던 인근 주민들에게 10만 평을 낮은 가격으로 양도했다. 그리고 61만 평은 성업공사를 통해 매각했다. 매각을 위한 공개입찰은 9차례나 유찰되었다. 제동목장이 투기나 투자용 부동산이 아니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제동목장은 1999년 한국공항㈜과 합병되었다. 이후 경주마 생산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제동한우’를 브랜드로 키우고 있다. 목장 안에 설치한 유리온실에서는 파프리카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다. 한국공항㈜은 제동목장 내 정석비행장과 정석항공관, 인근 제주민속촌박물관을 연결하는 관광레저벨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조중훈의 국토개발 의지는 사업을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 황무지를 개간해 목장을 만든 것은 축산업 육성과 생수개발로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관광레저벨트 구상의 일환이었다.
부동산 투기라는 오해를 받았을 때 조중훈은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한동안 제동목장에 발길을 끊기도 했지만 세상을 뜨기 전까지 주말이면 가족과 제동목장을 찾았다. 목장으로 향하는 조중훈의 발길은 멈췄지만 여기에 쏟아놓은 사랑은 아직도 한라산 기슭에서 소들과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