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의 예술가
조중훈은 낭만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노래도 잘 불렀고 블루스, 왈츠, 룸바 같은 춤도 출 줄 알았다. 일흔이 넘어서도 오토바이를 즐겼고, 여행할 때는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조중훈은 프랑스를 좋아하고 파리를 사랑했다. 드골공항에 내리면 “파리냄새가 난다”고 말하곤 했다. 볼 일이 있어 유럽의 다른 도시에 머물 때면 한시라도 빨리 파리로 가고 싶어 했다. 유럽노선을 개척할 때 전 세계 항공사들이 거점으로 삼는 프랑크푸르트를 두고 파리에 진을 친 것도 그의 유별난 ‘파리사랑’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럽 진출의 계기가 된 에어버스와 연을 맺기 몇 해 전부터 혼자서 파리 시내 곳곳을 답사하며 지점으로 쓸 건물까지 마련해 놓았을 정도다.
파리는 쉴 틈이 없었던 그에게 마음의 위안과 인생의 여유를 잠시나마 갖게 해준 휴식처이기도 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영락없는 파리지앵이었다. 거리에서 바게트를 들고 다니며 손으로 뜯어먹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그가 파리를 지향한 것은 어쩌면 전 세계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드는 이유와 같았다. 파리의 문화, 특히 예술에 조중훈은 매료되었다. 사업도 예술처럼 꽃피우고 싶었던 그였다.
1970년대 중반 대한항공이 파리노선을 개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파리에서 파티가 열렸다. 프랑스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중훈이 단상에 올랐다. 연설이 끝나자 현지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모두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사업가 조중훈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한 기자가 질문했다.
“사업이 예술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연설 중에 “나에게 사업은 예술이다”라고 했을 때 통역한 임원조차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었다. “사업은 예술이다”는 조중훈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강조한, 그의 사업 철학이 응축된 한마디다. 그에게 사업은 예술이며 그가 개척하고 완성한 사업 하나 하나가 예술작품이었다. ‘사업의 예술가’이자 ‘예술의 사업가’였다. 때로는 화가처럼 때로는 조각가처럼 사업을 구상했다.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관련 서적을 섭렵한 후 심사숙고해 밑그림을 그렸고 조심스럽게 색을 입혀갔다. 한비자의 ‘각삭지도 刻削之道’를 금과옥조로 삼아 앞을 내다보고 신중을 기해 사업을 조각했다.
조중훈을 ‘사업의 예술가’로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업한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가 돈을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역시 사업 자체에 혼신을 바쳤다. 부실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해 항공업에 뛰어들 때도 “항공을 예술처럼 하고 싶다”고 했고, 황무지를 개간해 제동목장을 키울 때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수익성만 따졌다면 그런 과감한 투자는커녕 인수 자체를 재검토했을 것이다.
사업에서 보여준 조중훈의 창조성도 예술의 본질이다. 수송외길을 고집하며 매진한 것도 남이 하는 사업을 곁눈질하거나 따라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장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작품은 작업 과정도 아름다워야 한다. 조중훈이 만들고 가꾼 사업은 결과도 과정도 모두 아름다웠다. 치열한 경쟁환경에서도 그는 ‘지고 이기는’ 지혜와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가로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고 경쟁자마저 그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예술혼을 불태운 사업의 거장, 조중훈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업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기업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업은 사업가에게 예술작품과 같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한다. 사업가의 창의력과 아이디어, 노력이 뒷받침되었을 때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업은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다.”
조중훈의 예술정신은 전 세계에 길을 열고 하나로 연결한 수송의 걸작을 완성하는 원동력이었다.
새벽의 나폴레옹
조중훈은 평생 부지런했다. 손에는 늘 새로 나온 책이 들려 있었고, 어린 시절 몸에 밴 독서 습관은 팔순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생을 하루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모두 읽은 다음 라디오로 국제뉴스를 듣고 새로 나온 책 한두 권을 속독하고 아침 7시 30분 사무실로 출근했다. 독서에서 얻은 지식은 경영에 반영되어 지식경영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조중훈의 독서경영은 이후 사내대학을 설립하고 정석.인하학원 등 육영사업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는 나폴레옹처럼 잠을 잤다. 밤에 자는 시간을 서너 시간으로 줄이되 낮에는 피곤할 때마다 자동차 안이든 집무실 소파에서든 5분씩 눈을 붙였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해외 지점장에게 지시를 하고 낮에도 피곤하면 잠시 간이침대에서 휴식했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두 발로 뛰었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밤새 궁리해 아침에 나와 해결하곤 했다.
“하루에 한 문제만 해결해도 일 년이면 365문제가 풀린다.”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담당직원을 호출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중훈은 한순간도 배우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무엇을 해보겠다고 작정하면 관련 서적을 수십 권씩 쌓아놓고 탐독했다. 항공공사 인수를 앞두고서는 일본책을 죄다 구해 머릿속에서 비행기를 분해했다. 나중에 정비사가 고장 난 엔진에 대해 브리핑할 때 포인트를 잡아줄 정도였다. 기종별 성능은 물론 히스토리까지 꿰고 있었다. 실무자 입장에서 보면 최종 결정권자와 의사소통이 수월했다.
조중훈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항공기 제작사를 방문했다. 최고경영자와 설계 엔지니어들을 만나 항공기 제작기술의 발전 방향을 파악했고, 이를 통해 항공기 시장의 미래를 예측했다. 항공기를 구입할 때 조중훈의 판단은 늘 적중했다. 대한항공 출범 초기인 1973년 점보기 2대를 구입했을 때 많은 사람이 “대한항공이 무리수를 둔다”고 했다. 국제연합UN에서 교통부문을 담당하는 한국인 전문위원이 찾아와 말렸을 정도다. 그러나 당시의 투자는 대한항공이 세계적인 항공사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조중훈은 오히려 더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불철주야 당면과제에 몰입했다. 점보기 도입을 결정할 때도 회의실에서 이사들과 일주일 넘게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토론했다. 이사들의 의견을 경청한 뒤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심이 서면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조중훈에게 사업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일에 대한 집념과 성취를 향한 열정이었다. 오직 돈 버는 것이 목표였다면 굳이 모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사업을 계속할 까닭이 없었다.
“항공업은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막대한 투자, 외국 항공사와의 경쟁, 적자노선에서의 손실, 고정비용 증가 등을 감안하면 투자에 비해 이윤이 적은 사업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조중훈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확고한 철학과 신념으로 수송산업의 토대를 닦았다. 조중훈 같이 외길을 걸어온 기업인은 흔하지 않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경계하고 수송에 집중했다. 그룹에서도 사업다각화를 주장하는 임원이 많았다. 종합상사를 설립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전자산업에 뛰어들자는 주장도 있었다. 신용카드사업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도 그랬다. 사업다각화에 열을 올렸던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을 수정하며 핵심사업 육성에 나섰지만 조중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송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의 수송론은 이렇다.
“수송은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고, 그 수단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송은 인체의 혈관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공간 이동은 삶의 필수적 요소이고, 시간 단축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다.”
21세기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시간과 공간의 경영이고 이를 위한 많은 이론과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조중훈은 수송업에 집중하면서 이 두 가지 과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틀을 오래 전에 마련했던 것이다.
직관과 통찰의 승부사
한진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할 즈음, 조중훈은 한진을 이끌어갈 전문경영인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조중훈이 후진을 양성하는 스타일은 독특했다. 알려주고 지시하기보다는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머릿속에 결론을 내려놓고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직원들 스스로 의견을 제시하게 했다. 1970년대 말 조중훈은 한 임원에게 급히 전갈을 보냈다.
「바레인에 다녀오게.」
바레인에 왜 가야 하는지, 가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한마디도 없었다. 임원은 출장을 왔으니 무엇이라도 건져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바레인 항공국장을 찾아가 항공협정을 맺자고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대한항공의 중동진출에 발판이 된 1년짜리 취항권을 얻어 왔다. 돌아와 조중훈에게 “무엇을 해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하자 조중훈이 웃으며 반문했다.
“그랬다면 자네는 내가 시키는 일만 했을 것이고, 내 복사본밖에 더 되었겠나?”
조중훈은 생각하게 만드는 멘토였다. 목표만 제시할 뿐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1983년 10월 9일 조중훈은 홍콩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이 “오늘 자정까지 알루미늄관 棺 17개를 준비해 공항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했다. 그게 다였다. 관이 왜 17개나 필요한지, 왜 꼭 알루미늄관이어야 하는지, 어떤 설명도 없었다. 지점장은 알루미늄관을 본 적도 없었다.
홍콩 시내 곳곳을 수소문해 알루미늄관을 짜는 업체를 가까스로 찾아내긴 했지만, 한 군데서 자정까지 17개나 조달할 수는 없었다. 업체를 설득해 다른 업체들에 연락을 취한 끝에 겨우 수량을 맞추어 자정 직전에 홍콩공항까지 가져다 놓았다. 이내 대한항공 특별기가 도착했고 알루미늄관들을 싣고 버마 지금의 미얀마로 날아갔다. 홍콩지점장은 그제서야 그 관들이 어디에 필요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웅산 참사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들의 폭탄테러로 대통령을 수행한 참모 등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우리 정부는 조사단을 현지에 급파해 버마 당국과 합동조사를 벌였지만 아무도 시신을 어떻게 한국으로 가져올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조중훈은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무엇이 필요한지 직감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 장교들의 시신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알루미늄관으로 옮겨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리라. 더운 나라에서 목관으로 옮길 경우 비행 중에 시신이 부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조중훈은 자녀교육에서도 훈계보다는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 셋째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가 유학시절 친구들을 따라 머리를 기른 적이 있었다. 조중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무라는 대신 아들을 데리고 나가 양복을 한 벌 사주고 나서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이런 옷에는 그런 머리가 안 어울리는 것 같구나.”
장남 조양호 현 한진그룹 회장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부자가 통화한 것이 유학한 지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용건은 간단했다.
“일 년이 되었구나. 수고했다.”
독립심을 키워준 것이다. 조중훈은 아들들과 한진그룹을 이끌어갈 전문경영인들이 ‘창업주 조중훈’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업이 무엇이고, 훌륭한 기업가란 무엇인가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 깨우치기를 바랐다. 조중훈 자신도 언제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1987년 11월 28일 밤,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해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버마 근해 안다만 상공에서 공중폭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한항공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기체결함이나 조종사의 실수로 벌어진 참사라면 항공사로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물론 미국, 일본도 추측만 할 뿐 어떤 입장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질 경우 대한항공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상황이었다.
조중훈이 직접 나섰다. 우선 탑승자 명단을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 둘을 찾아냈다. 둘은 바그다드에서 탑승해 아부다비에서 내린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조중훈은 일본 당국에 연락해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확인 결과, 그런 일본인은 없었다. 여권은 위조된 것이었다.
조중훈은 그들이 북한 테러범임을 직감했다. 즉시 아부다비지점에 연락해 추적한 결과 그들이 바레인으로 간 것을 확인했다. 다시 바레인지점에 연락해 현지 경찰과 함께 공항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붙잡았다. 신분이 발각되자 두 테러범은 담배 필터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는데, 남자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여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수사 결과, 테러범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임이 밝혀졌다. 「88서울올림픽 참가 신청을 못하게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해 라디오와 술로 위장한 고성능 폭탄을 좌석 선반 위에 남겨두고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렸고, 항공기는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된 것이었다.
조중훈은 사업가로서 동물적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폭파되었다는 물증이 있어야 했다. 조중훈은 직접 미얀마 근해로 날아가 미 해군의 협조를 구해 해안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마침내 기체 파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중훈은 사업가로서 동물적 감각이 있었다. 항공기를 새로 구입할 때의 일이다. 기획실 직원들이 며칠 밤을 새워 꼼꼼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예상 단가와 손익을 계산했다. 득보다 실이 많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조중훈은 보고서를 덮고 미국에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그 길로 보잉을 찾아가 항공기를 12대나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항공기를 12대나 사겠다고 하자 침체에 빠져 있던 보잉도 일어서고, 보잉 본사가 있는 시애틀의 경기도 살아났다. 그러자 구입을 미루어왔던 다른 항공사들이 하나둘 몰려들더니 몇 달이 지나자 항공기 가격이 껑충 뛰었다. 대한항공은 싼 값에 항공기를 입도선매하고 보잉과 돈독한 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전문가들이 분석한 보고서보다 조중훈의 직감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현장에서 체득한 것이다. 그는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고 주판을 튕기며 사업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완벽한 기획안을 들고 와도 현장을 확인하기 전에는 결정하지 않았다. 노선을 개설할 때도 현지 재래시장과 거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그 도시의 문화와 발전 가능성을 점검했다. 직원들에게 늘 맡은 업무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현장전문가가 되라고 했다. 맏아들 조양호를 기획팀이나 재무팀이 아닌 정비팀으로 발령한 것도 현장에 경영의 기본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들이라도 지시사항을 해결한 후에 보고하면 “알았어, 내가 가볼게.” 했다. 설마 갈까 했는데 주말에라도 꼭 현장을 본 후에 결재했다. 미국지사에서 드릴 하나를 사서 결재를 올려도 몇 마력짜리인지, 중고품인지 새것인지, 할인마트에서 샀는지 전문매장에서 샀는지 카탈로그까지 붙여 보고하라고 했다.
직원에게 능력 이상의 임무를 맡기면서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한번 일을 시키면 무조건 믿어주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맡은 일에 겁을 내지 않고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직원들의 자신감을 살려주며 세심하게 배려하다가도 가끔 느닷없이 브레이크를 걸곤 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갑자기 엄하게 대했다. 돌아서서 눈물을 뚝뚝 흘린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자신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매너리즘에 빠진다 싶으면 한 번씩 끈을 조여 맨 것이다.
관상도 잘 봤다. 얼굴 생김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사람 됨됨이를 살펴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평범해 보이는 직원들에게서도 남다른 특징이나 장점을 곧잘 찾아내 삼국지에 나오는 아무개 같다곤 했다. 임원들 눈에는 우수한 직원도 조중훈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했지만 그런 직원이 나중에 꼭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들은 본업에 충실하기보다는 임원들에게 아부하는 데 열심인 직원들이었다.
조중훈은 현장을 확인하기까지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현장 확인을 통해 직관과 경험으로 판단을 내렸다. 경영상 문제의 대부분이 현장에 있고 그 해결책도 현장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미국 경영학의 창시자인 프레드릭 W. 테일러는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면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체득한 ‘과학적 관리론’을 주창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미국 경영학의 효시가 되었다. 조중훈의 현장경영이 오늘날 한진은 물론 우리나라 물류산업 발전의 기반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중훈은 강자에게 강한 승부사였다. 198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선출할 때의 일이다. 신군부는 재계를 압박하기 위해 당시 정주영 전경련 회장을 밀어내기로 결정하고 후임을 낙점해 통보했다. 하지만 정보기관까지 총동원되었던 총회에서 조중훈은 “정 회장을 다시 회장으로 추대하자”고 제안해 연임을 성사시켰다.
국산 전투기 사업의 주계약업체인 미국 노드롭을 방문했을 때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회의는 대한항공의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갖기로 되었다. 휴일에 참석한 것이 못마땅했던 존스 노드롭 회장은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선약이 있어 실례하겠소.”
그 순간 조중훈이 소리쳤다.
“Just a moment. Sit down! 잔말 말고 앉으시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중훈의 한마디에 존스 회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좌중은 조용해졌고 참석자 모두 당황했다. 상식으로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항공계의 거물인 존스 회장을 당황시켜 전투기사업에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조중훈의 기발한 행동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미국인들은 예상 밖의 언사와 행동에 허점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 날짜를 일요일로 잡은 것도 조중훈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마음을 낚는 리더
조중훈은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늘 담배를 지니고 다녔다. 집무실 응접탁자에도 언제나 담배와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마주앉으면 애연가처럼 자연스럽게 담배를 권하고 자신도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상대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몇 모금 빨아당기는 척하다가 슬쩍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중에 조중훈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대는 그런 깊은 배려에 감탄하곤 했다.
조중훈이 작정하면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하고 파리노선을 개척한 후 한불경제협력위원회를 이끌게 된 1970년대 중반, 조중훈은 프랑스에 정통한 일꾼을 영입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젊은 적임자를 찾아냈다. 조중훈은 청년을 부암장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하며 사람 됨됨이를 보기 위해 술잔도 기울였다. 그날 밤 헤어지면서 조중훈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조만간 부르겠다”고 했다.
청년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프랑스유학 중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사상범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이었다. 동백림사건은 1967년 예술인과 교수 등 194명이 동베를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였다며 처벌당한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청년이 출소한 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요주의 인물을 채용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지만, 국내에서도 감시받는 그가 프랑스를 드나드는 것을 중앙정보부에서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며칠 후 청년은 대한항공에 입사했고 조중훈을 수행해 프랑스로 떠났다. 당시 조중훈이 중정을 찾아가 청년을 영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각서를 쓰고 담판을 지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청년이 시국 관련 문제를 일으켜 처벌을 받게 된다면 나 역시 똑같은 처벌을 받겠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조중훈의 배포와 배려에 감명을 받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것이 자신을 믿어준 조중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조중훈이 주한미군의 물자 수송을 맡게 된 것, 베트남전에서 수송용역을 할 수 있게 된 것, 이후 한일, 한불 외교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모두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국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원어민 못지않게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단어 몇 개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진심의 언어였기에 가능했다.
조중훈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그 지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상대의 편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했기에 답을 찾아내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한불경제협력위원회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할 때의 일이다. 프랑스 측 인사들을 감동시킬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가 연회 장소로 생각해낸 것은 놀랍게도 경회루였다. 실무자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출입이 금지된 경회루에서 연회를 여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지만, 정부 당국을 설득해 관철시켰다. 경회루에서 회의가 무르익을 무렵, 조중훈이 일어나 운을 뗐다.
“이곳은 조선의 왕들이 연회를 여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프랑스를 대표해 이곳에 오신 분들인 만큼 한국 정부가 여러분을 국가원수급으로 대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개척해놓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던 것도 다른 업종의 사업가와 기업을 존중하고 배려했기 때문이다. 1978년 당시 김해공장에서 직원들 간식으로 매일 빵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담당임원은 빵집에서 구입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 주면 비용이 적게 든다며 아예 빵 굽는 기계를 구매하자는 품의서를 올렸다. 그랬더니 조중훈이 말했다.
“빵장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수송외길을 벗어나 제조업에 손을 댔다면 한진의 고객사는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조중훈의 배려는 경쟁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시아나항공에 대해서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우리나라의 항공산업을 함께 키워야 할 동반자”라고만 했다. 행동도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나항공이 출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민항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임원 몇이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서운함을 피력하자 조중훈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제 나라 기업 흠 잡는 것 아니오!”
조중훈은 사업에는 누구보다 냉철했지만 사람에게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는 회사의 임직원들 앞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직원들에게도 인자한 아버지 같았다. 1960년대 초, 정비사가 차량 밑에서 정비를 하다가 다친 일이 있었다. 조중훈은 안타까운 마음에 병원을 알아봐주고 요양하라며 부암동 자택 밑에 방까지 얻어주었다. 당시 직원이 700명이 넘었는데 정비사 한 명한테도 그렇게까지 신경을 썼다.
언젠가 임원들과 프랑스로 출장을 갔다가 파리 교외에서 골프를 한 적이 있었다. 11번 홀에 들어갈 즈음 조중훈은 갑자기 먼저 들어가겠다며 카트를 타고 가버렸다. 임원들이 18홀까지 돌고 나서 숙소에 들어갔더니 조중훈은 임원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놓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1998년 30년 넘게 동고동락한 참모의 아들이 희귀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인하대병원 암센터장에게 꼭 살려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날마다 환자의 상태를 알려달라고 일러두었다. 두 달쯤 지나 암센터장으로부터 “최선을 다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중훈은 참모를 불렀다. 말문을 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참모는 30년 가까이 조중훈을 보필하면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참모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참모에게도 병이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조중훈이 앓고 있는 병과 같았다. 조중훈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참모를 돌보도록 했고 덕분에 그의 병이 나았다.
조중훈은 소통을 중시했다. 진정한 소통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마음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오늘날 모든 조직에서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부분 신뢰가 없는 회의식 의견교환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정성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중훈은 마음으로 소통해 신뢰의 길을 열었기에 사업의 길도, 외교의 길도, 문화의 길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조중훈은 기업과 경영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업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일했고 다음 단계를 위한 역량을 얼마나 쌓았느냐를 중시했다. 그러기에 직원의 삶의 질을 중시했고 직원의 열정과 자신감이 회사의 최대 자산임을 강조했다.
동전 두 닢 정신
평소 조중훈은 “항상 이기기만 바라는 것은 오만”이라며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사치와 낭비도 철저하게 경계했다. 말년까지도 자장면과 냉면을 즐겼고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회장실에서도 자장면을 배달해 먹곤 했는데, 그와 식사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메뉴도 자장면이다.
해외출장 때도 손님을 만날 때가 아니면 호텔을 잡지 않았다. 쓸데없이 왜 돈을 쓰느냐며 직원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한번은 에어컨이 없는 사원아파트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다가 입이 돌아가 두 달 동안 침을 맞은 적도 있다.
아내 김정일 여사 역시 근검절약의 표상이었다. 오일쇼크 때는 석유를 아낀다고 난방도 하지 않고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지낼 정도였다. 한진의 2세 경영인들이 유난히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했던 것도 김정일 여사의 가정교육이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조중훈은 빚지는 것에 대해서도 결벽증이 있었다.
“기업이 빚을 지는 것은 결국 국민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기업이 망해 국민에게 빚더미를 안겨주고 사주만 살아남는 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다.”
한번은 대한항공이 정부로부터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한 적이 있었는데, 조중훈은 전액을 자신 명의로 융자받았다. 은행에서 “이 정도 금액이면 아들대까지 갚아도 다 못 갚는다”고 하니까 융자받는 당일 같은 금액으로 적금을 들었다. 만기일이 되면 융자금을 다 갚을 수 있도록 역산한 것이다. 아들에게 빚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중훈이 1996년 런던에 머물 때의 일이다. 런던지점장에게 “한국 승객들이 런던에 오면 주로 무얼 사느냐?”고 물었다. 지점장이 “버버리 제품이 가장 인기가 있고 도자기 찻잔이나 그릇도 많이들 사가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조중훈은 “요즘 경기가 좋아 대한항공에 한국인 승객이 폭주하고 있지만 너무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외화를 낭비하면 나라가 어려워지고, 나라가 망하면 대한항공도 망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어려울 때를 대비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1년 만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조중훈이 일본에서 귀국하던 중 도쿄공항 귀빈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 직원에게 카메라잡지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카메라잡지를 사와 2,830엔짜리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중훈은 지갑에서 천 엔짜리 지폐를 2장 꺼내고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렸다. 30엔이 모자랐다. 옆에 있던 아내에게 “30엔만 빌려 달라”고 했다. 아내가 “그냥 3,000엔을 주시라”고 했지만, 기어이 10엔짜리 동전 세 개를 받아내 2,830엔을 맞춰 건넸다. 10엔이라고 무시하면 나중엔 백만 엔의 계산이 틀리게 된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 장남 조양호가 미국에서 근무할 때 월급 외에 한 푼도 주지 못하게 했다. 5년 근무하는 동안 월세가 300달러까지 올라 나중에는 500달러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조중훈은 가끔 미국에 오면 아들을 슈퍼마켓에 데리고 가 필요한 것을 마음대로 사라며 인심을 썼다. 꽉꽉 눌러 담아봐야 100달러도 안 되었는데 그게 유일한 인센티브였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조중훈이었지만 번 돈을 쌓아둔 것도 아니었다. 아낄 땐 아꼈지만 쓸 땐 쓸 줄 알았다. 인하대에 정석학술정보관을 지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 동전 두 닢 갖고 가는 데 다 쓰고 가야지.”
붓다의 마음으로 덕을 쌓다
독실한 불자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조중훈은 한진상사를 설립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조중훈의 부모는 아들이 창업한 이후 아침저녁으로 조계사에 들러 108배를 올리고, 사업에 큰 고비가 있을 때는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 3일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그 절의 고승 탄허 스님과 주지인 만화 스님과 교분을 쌓았다.
천년고찰 월정사는 당시 폐허나 다름없었다. 6.25 때 공비의 은거지를 없앤다며 오대산에 있는 모든 사찰과 암자를 불태웠는데, 월정사도 그때 전소되어 탑 하나만 남게 되었다. 1964년 만화 스님은 월정사를 복원하는 뜻을 세웠다. 우선 본전인 적광전 寂光殿을 복원하기 위해 전국 법당을 돌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적광전 배치를 고증해 공사에 착수했다. 나무를 베어놓고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끌고 내려오기 좋았기 때문이다. 스님, 신도, 평창군 주민이 모두 달라붙어 운반하는데도 큰 나무는 며칠씩 걸렸다. 질 좋은 나무는 산에서 구한다고 해도 기와나 다른 목재는 돈을 주고 사와야 했다. 돈이 없어 임금 체불도 예사였다. 보리밥과 감자로 싸준 도시락에서 쉰내가 나 인부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임금이 밀리면
만화 스님이 강릉 등지를 돌며 시주 받은 돈으로 쌀을 팔아 나눠주었다.
공사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나무를 베는 것이 불법이어서 영림서 지금의 산림청에 잡혀가기 일쑤였다. 스님이나 공사 책임자가 잡혀가면 공사에 차질을 빚게 되니 아예 잡혀갈 담당을 정해놓았을 정도였다. 급기야 만화 스님이 목재상들의 고발로 옥고를 치를 지경에 이르렀다.
6.25 때 소실되었다가 1968년 조중훈의 지원으로 복원된 월정사 적광전.
그즈음 베트남에 가 있던 조중훈은 어느 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오대산에 올랐는데 전소되어 터만 남은 월정사 뜰 한가운데 서 있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조중훈은 서울에 있는 부친에게 꿈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부친도 예사롭지 않다며 월정사로 가서 만화 스님을 만났다. 만화 스님은 “대웅전을 다시 지어 부처님을 모셔야 하는데 공사비가 없어 난감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부친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조중훈은 서울에 돌아와 만화 스님을 집으로 초대해 상세한 얘기를 들었다. 공사비는 적잖게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지만 조중훈은 “어떻게 해서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월정사는 부친이 자신을 위해 불공을 드린 절이기도 했고,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반드시 복원해야 할 문화재라고 생각했다. 조중훈의 지원으로 공사는 재개되었고 착수 4년 만인 1968년 적광전이 완공되었다.
조중훈은 사업이 어렵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월정사를 찾아 탄허 스님, 만화 스님과 차담 茶啖을 나누곤 했다. 그의 불심은 가족 모두에게 전해졌다. 해외출장 때도 사찰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들렀다. 조중훈은 불사에 큰 기여를 했지만 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월정사에 기도하러 갈 때는 기별도 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점퍼차림으로 탑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조용히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초파일이나 백중일처럼 스님과 신도들로 붐비는 날은 방문을 피했다. 스님들은 조중훈 부부가 오면 오대산 산나물로 답례했다.
적광전 재건 후에도 조중훈은 월정사 불사에 지원을 계속했다. 범종을 만들고 박물관을 지을 때도 애정을 쏟았다. 범종을 주조하기 위해 베트남 전장에서 탄피를 모아 보내주기도 했다. 집 마당에 있는 석탑까지 월정사로 옮겨놓았다. 예순 되던 해 불상 개금을 하고 여든 되던 해에는 적광전 단청 불사를 했다. 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은 경주옥석 네 덩이를 합쳐 석굴암의 부처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처음에는 백옥경 주옥석이었는데 조중훈이 전액을 시주해 금을 입혔다. 개금을 마치고 나서 조중훈은 자녀들에게 “부처님 상호가 꼭 너희 할머니와 어머니 상호를 닮아 원만상호이시구나!” 했다. 적광전 단청 불사 때는 값싼 단청은 유해물질이 나오고 오래 가지 않아 빛이 바랜다는 소리를 듣고 거금을 선뜻 내놓았다.
조중훈은 사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사 때마다 현장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어느 해 초파일에 월정사 종무소 직원들이 등을 매달기 위해 법당 기둥에 못을 박은 것을 보고 “못을 박으면 기둥이 오래가지 못하니 뽑으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월정사 일주문 근처에 조중훈의 공덕비가 서 있다. 당시 불사의 실무를 맡았던 스님은 아직도 조중훈의 사리탑을 참배하고 기제 때마다 용인에 있는 조중훈의 묘를 찾아 추모독경하고 있다.
조중훈은 불국사 복원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불국사는 일제강점기에 개수공사를 했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가 행방불명되었고 일제는 공사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1966년에도 보수가 진행되었지만 복원은 아니었다. 불국사는 여전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어 3년6개월에 걸친 노력으로 불국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초 2억 원 정도 들 것으로 예상된 공사비는 4억 원을 넘어섰다. 경내에 포함되는 부지가 늘어나면서 철거할 민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조중훈을 비롯한 몇몇 기업가가 공사비 대부분을 부담했다. 정부가 복원을 주도했지만 조중훈 같은 기업가가 동참하지 않았다면 불국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 조중훈은 불국사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잊을 수 없는 세느 강의 음유시인
조중훈은 2002년 11월 17일 오후 1시 여든둘 생을 마감했다. 49재는 월정사, 100재는 등명낙가사에서 봉행되었다.
생전 조중훈은 파리에 머물던 어느 날, 차를 타고 세느 강변을 달리다가 바이런의 시를 읊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가로수 잎 색이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달라. 옛날 일을 자꾸 잊어버려.
잊어버릴 수 있는 건 신이 주신 제일 큰 능력이야.”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이 주신 가장 큰 능력으로도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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