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사업의 예술가

사업의 예술가

조중훈은 낭만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노래도 잘 불렀고 블루스, 왈츠, 룸바 같은 춤도 출 줄 알았다. 일흔이 넘어서도 오토바이를 즐겼고, 여행할 때는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조중훈은 프랑스를 좋아하고 파리를 사랑했다. 드골공항에 내리면 “파리냄새가 난다”고 말하곤 했다. 볼 일이 있어 유럽의 다른 도시에 머물 때면 한시라도 빨리 파리로 가고 싶어 했다. 유럽노선을 개척할 때 전 세계 항공사들이 거점으로 삼는 프랑크푸르트를 두고 파리에 진을 친 것도 그의 유별난 ‘파리사랑’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럽 진출의 계기가 된 에어버스와 연을 맺기 몇 해 전부터 혼자서 파리 시내 곳곳을 답사하며 지점으로 쓸 건물까지 마련해 놓았을 정도다.



파리는 쉴 틈이 없었던 그에게 마음의 위안과 인생의 여유를 잠시나마 갖게 해준 휴식처이기도 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영락없는 파리지앵이었다. 거리에서 바게트를 들고 다니며 손으로 뜯어먹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그가 파리를 지향한 것은 어쩌면 전 세계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드는 이유와 같았다. 파리의 문화, 특히 예술에 조중훈은 매료되었다. 사업도 예술처럼 꽃피우고 싶었던 그였다.

1970년대 중반 대한항공이 파리노선을 개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파리에서 파티가 열렸다. 프랑스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중훈이 단상에 올랐다. 연설이 끝나자 현지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모두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사업가 조중훈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한 기자가 질문했다.
“사업이 예술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연설 중에 “나에게 사업은 예술이다”라고 했을 때 통역한 임원조차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었다. “사업은 예술이다”는 조중훈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강조한, 그의 사업 철학이 응축된 한마디다. 그에게 사업은 예술이며 그가 개척하고 완성한 사업 하나 하나가 예술작품이었다. ‘사업의 예술가’이자 ‘예술의 사업가’였다. 때로는 화가처럼 때로는 조각가처럼 사업을 구상했다.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관련 서적을 섭렵한 후 심사숙고해 밑그림을 그렸고 조심스럽게 색을 입혀갔다. 한비자의 ‘각삭지도 刻削之道’를 금과옥조로 삼아 앞을 내다보고 신중을 기해 사업을 조각했다.

조중훈을 ‘사업의 예술가’로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업한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가 돈을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역시 사업 자체에 혼신을 바쳤다. 부실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해 항공업에 뛰어들 때도 “항공을 예술처럼 하고 싶다”고 했고, 황무지를 개간해 제동목장을 키울 때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수익성만 따졌다면 그런 과감한 투자는커녕 인수 자체를 재검토했을 것이다.

사업에서 보여준 조중훈의 창조성도 예술의 본질이다. 수송외길을 고집하며 매진한 것도 남이 하는 사업을 곁눈질하거나 따라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장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작품은 작업 과정도 아름다워야 한다. 조중훈이 만들고 가꾼 사업은 결과도 과정도 모두 아름다웠다. 치열한 경쟁환경에서도 그는 ‘지고 이기는’ 지혜와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가로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고 경쟁자마저 그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예술혼을 불태운 사업의 거장, 조중훈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업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기업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업은 사업가에게 예술작품과 같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한다. 사업가의 창의력과 아이디어, 노력이 뒷받침되었을 때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업은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다.”
조중훈의 예술정신은 전 세계에 길을 열고 하나로 연결한 수송의 걸작을 완성하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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