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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예술이다

소년은 바다를
꿈꾸었고 바다는
소년의 꿈을 품었다

시련은 숙명이다.
고통스럽지만 사람을 단련하고
깨닫게 하는 통과의례다.

소년은 바다를
꿈꾸었고 바다는
소년의 꿈을 품었다

시련은 숙명이다. 고통스럽지만
사람을 단련하고 깨닫게 하는 통과의례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고 해원양성소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소년은 일본 조선소의 수습기관사로 발탁되어 열입곱 나이에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넌다.
그가 처음 바다로 나아간 순간 오디세이가 시작되었다.
식민지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의 바다는 조선의 바다보다 넓었다.
하지만 동포의 비참함이 드러난 ‘상처의 바다’였다.
주경야독으로 단련한 소년은 기관사가 되어 중국으로 간다.
상하이에서 본 중국의 바다는 일본의 바라보다 넓었다.
세계인이 몰려드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은 일본 배를 타고 왔지만, 언젠간 나의 배를 타고 오리라!’ 다짐한다.
3년 후, 청년이 된 소년은 멀고도 험한 항해를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다.
식민지 조국의 바다는 여전히 작았지만 일본의 바다, 중국의 바다보다 푸른 파도가 청년의 가슴속에서 일고 있었다.
그 푸른 의지로 청년은 태평양전쟁과 6·25의 폐허 위에서도 다시 사업의 꽃을 피우기 위해 잿더미를 움켜쥐었다.
밑거름은 신용이었다.
신용을 연료로 불붙은 청년의 열정은 이후 한진의 사운을 완전히 바꿀 베트남의 바다에서 용솟음치게 된다.
파도마저 삼킬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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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사업은 더 멀리서 봐야 한다.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사업은 더 멀리서 봐야 한다.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조중훈은 그것이 기회임을 포착하고 모든 걸 걸었기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타이밍이란 그런 것이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멀리서 봐야 한 폭의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도 전투만 보아서는 안되고, 전장을 둘러싼 모든 것을 봐야 한다.
조중훈은 퀴논항을 바다나 육지에서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서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떤 사업 기회가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눈에 간파했다.
베트남에서 사업의 기회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주한미군의 수송을 책임지면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신용은 어떤 담보나 배경보다 든든했다.
부암장 환송파티의 추억은 텐타곤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퀴논항의 미군 수뇌부를
움직이게 했다. 신용의 승리였고, 열정의 보답이었다.
조중훈은 베트남에서 미군의 마음만 산 게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벌기 위해 합류한 근로자, 파월장병, 그리고 상처받은 베트남 현지인들의 마음까지 샀다.
그것은 사선을 넘나들며 수송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퀴논의 전설은 이후 하늘길과 바닷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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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항공 역사에는
두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적자투성이 국영 항공사를
구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세계 항공 역사에는 두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하나는 육중한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아오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한국의 항공사가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적자투성이 국영 항공사를 구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대한항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꿈꾸던 해운왕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항공이었지만, 조중훈은 기왕 할 거라면 예술처럼 하고 싶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항공사를 운영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아보겠다고했을 때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육중한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것처럼 그는 척박한 땅에서 고사 직전의 항공사를 이륙시켰다.
높이 날 수 없다면 이륙하지도 않겠다는 듯 처음부터 강력한 추진력으로 고도를 높였다.
나아가 점보기를 도입하고 태평양을 건너는 대모험을 감행했다. 조중훈은 매의 눈으로 하늘길을 내다보았다.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파리의 유럽노선의 거점으로 삼고 뉴욕이 아닌 LA로 미주노선을 개척한 것이나 일본 지장도시의 승객을 공략한 것 모두 역발상의 선경지명이 아닐 수 없다. 비행기가 날 수 있었던 것은 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공의 불모지 한국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항공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성공을 확신한 조중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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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
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한 것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
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한 것은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이해관계 때문이었지만, 조중훈은 어쩔 수 없는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업가였다.
에어버스 항공기 구매는 유럽노선을 개척하고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끈끈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피랍기 송환 과정에서 맺은 인연은 중국 취항과 영공 통과의 쾌거로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대한항공은 아시아와 유럽, 나아가 러시아의 하늘에 이르기까지 국제노선을 급격하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조중훈의 집무실에 걸린 대한항공 취항노선도는 거미줄처럼 새카맣게 변해갔다.
1972년 LA취항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시작된 노선 개척은 15년만에 대한항공을 세계적인 항공사로 변모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도 조중훈의 날개를 꺾지는 못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구름 위로 올라가는 역발상으로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창업 때부터 목숨보다 중요하게 지켜온 신용은 절체절명의 순간 큰 힘이 되어주었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이 대한민국도 대한항공도 아닌 조중훈을 담보로 거금을 대출해주었을 만큼 그의 신용은 탄탄했다.
제공호는 또 하나의 사업보국 작품이었다.
조중훈은 기업의 이익보다는 국익과 공익을 우선하는 기업가였다.
대한의 날개는 세계의 날개가 되어 더 높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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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이 키를 놓지 않는 한
전진하는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

해운왕을 꿈꾸던
청년은 장년이 되어서야
바다로 돌아왔다.

선장이 키를 놓지 않는 한
전진하는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

해운왕을 꿈꾸던 청년은 장년이 되어서야 바다로 돌아왔다. 역시 바다는 녹록지 않았다.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조중훈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실패를 안겨준 후에야 바다는 비로소 기회를 주었다.
퀴논항에서 본 컨테이너는 조중훈의 꿈을 담아낼 만큼 충분히 컸다.
해운업 실패 후 한진해운으로 재기한 조중훈은 컨테이너선으로 선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상하이를 오가며 ‘언젠간 내 배를 타고 다시 오리라’ 다짐했던 식민지 소년은 선대를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며 감격했다. 잠잠하던 바다는 또다시 성난 파도로 선대를 덮쳤다.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진해운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개선작업으로는 피할 수 없었다.
재건만이 답이었다.
창조적 파괴로 한진해운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다.
조중훈은 하늘에서 얻은 경험을 바다에서 구현하리라 마음먹었다.
항공사의 경영기업을 해운사에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 해운 역사상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구상이었다.
기업재건이 탄력을 받으면서 휘청하던 한진호는 다시 균형을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항공사의 장점으로 재무장한 한진호는 하늘을 나는 배로 환골탈태했다.
전진하는 배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선장이 열정의 키를 놓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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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

일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며 조중훈은 수송외길을 고집했다.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수송외길을 걸으려고 해도 당시 국내 기간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사옥도 짓고 길도 닦아야 했고, 배가 들어오게 하려면 부두도 만들어야 했다.
건설과 토목은 수송외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수송은 끊임없이 길을 개척하는 일이다.
조중훈은 20~30년을 내다보고 미래를 위해 필요한 시설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사업을 통해 국익과 공익에 기여한다는 조중훈의 의지는 사회간접자본 구축으로 실현되었다.
조중훈은 우리나라가 물류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관련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함을 절감했다. 인청항 건설, 공항청사 확충, 영종도 신공항 건설, 전천후 항공유 수급시스템 구축, LPG충전소 설치는 그런 의지와 안목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한일개발은 움라지 고속도로 공사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고 신뢰를 지켰다.
이는 훗날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에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공사를 인수해 조선업에 진출한 것도 해운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기 위한 투자였다.
돌밭을 일궈 가꾼 제동목장은 국가적 차원의 국토사업에 참여한 의의가 크다.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은 위대한 작품으로 완성되었고 조중훈이 지휘하는 사업 오케스트라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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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외교다.
외교력은 신뢰와 열정에서
나온다.

수송은 외교와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외교다.
외교력은 신뢰와 열정에서
나온다.

수송은 외교와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실어나르는 대상이 승객과 화물이 아니라 양국의 이해관계라는 점이다. 그런 이해관계를 실어나르는 일은 정치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설득이 필요하다.
조중훈은 수송외길을 개척하며 민간 차원에서도 훌륭한 외교를 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기업이 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 말고도 민간외교를 통해 국익에 일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진의 사업이 계속 밖으로 뻗어가면서 조중훈의 명성도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고 정부의 요청으로 외교를 해야 할 때가 많아졌다.
민간외교가로서 조중훈은 전후50년 한국 외교사 곳곳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세계 굴지의 철강기업 포스코의 탄생에도 조중훈은 숨은 공신이었다.
프랑스 정계의 실세 쉬드로의 눈에 조중훈은 프랑스인보다 프랑스를 더 잘 이해하는 한국인이었다.
88서울올림픽 유치의 주역이 조중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익을 위하는 일을 내세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중국, 몽골과의 경제교류도 조중훈의 우정이 이루어낸 값진 성과였다.
사업으로 길을 열고 그 길을 통해 국가간 갈등까지 해결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드러내지 않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조중훈은 대한민국 외교무대의 막후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활약한 민간외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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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때가 없다.
장소도 없다.
배우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사업가는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보다
번 돈을 얼마나 가치 있게
썼느냐로 평가받는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
장소도 없다.
배우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사업가는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보다 번 돈을 얼마나 가치 있게 썼느냐로 평가받는다.
인하공대를 인수하는 것이 수익은커녕 얼마나 비용이 들어갈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투자였지만 그는 교육을 두고 계산하지 않았다.
일 년을 내다보면 농사를 짓고, 십 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키우고, 백 년을 내다보면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며 돌산을 깎아 학교를 지었다.
벼를 키우는 것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다.
벼를 키우는 것도 그럴진대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이치를 조중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했다. “공부는 때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은 조중훈은 대학교육이 캠퍼스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며 사내대학을 설립했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던 조중훈에게 배움은 평생 애틋함이었다.
그가 받은 세 개의 명예박사 학위는 경영과 교육 현장에서 흘린 땀과 눈물에 수여한 훈장 같은 것이다.
조중훈은 교육에 투자하는 것을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업보국을 이룩하려는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하는 소명으로 여겼다.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조중훈에게 일평생 가장 뜻있는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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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 있는 사람에겐
사업도 예술이다.

조중훈은 사업의
예술가이자
인생의 예술가였다.

인간미 있는 사람에겐
사업도 예술이다.

조중훈은 사업의 예술가이자 인생의 예술가였다.
그에게 사업은 예술이며 그가 개척한 사업 하나 하나가 예술작품이었다. 화가의 영감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조심스럽게 색을 입혀갔다. 한비자의 ‘각삭지도(刻削之道)’를 금과옥조로 삼아 시작할 때 앞을 내다보고 신중을 기해 사업을 조각했다.
수송외길을 고집하며 매진한 것도 자신의 사업에서 최고의 작품을 창조하려는 장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작품은 작업하는 과정도 아름다워야 한다.
조중훈이 가꾼 사업은 결과도 과정도 모두 아름다웠다.
치열한 경쟁환경에서도 ‘지고 이기는’ 지혜와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
조중훈은 또한 인생의 예술가였다.
그의 인생은 예술처럼 감동적이다.
사업에는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신의와 배려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자식을 직원처럼, 직원을 자식처럼 여겼다. 그가 마음을 사려 하면 누구라도 줄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했기에 가능했다.
조중훈의 지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상대의 편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했기에 답을 찾아내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조중훈은 직관과 통찰의 승부사였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현장에서 체득한 것이다.
사업과 인생의 예술가는 모든 것을 잊고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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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진해 해원양성소. 오늘날 한국해양대의 전신이다.

1930년대 상하이는 세계 문물과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조중훈은 유대인 상인의 사업철학을 배웠다.

1945년 인천 항동 한진상사 창고

한진상사의 초기 사업이 순항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용을 잃지 않았기 떄문이다.

한진상사의 초기 사업이 순항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용을 잃지 않았기 떄문이다.

한진상사의 초기 사업이 순항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용을 잃지 않았기 떄문이다.

미군 수송 용역은 한진상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였다.

미군 장성들은 조중훈의 신용과 열정에 감탄했다.

1959년 한진상사 문산영업소

1966년 주한미8군사령부

1969년 서울-대전 한진고속 개통식

한진상사가 하역을 책임진 후로 퀴논항에서 체화가 없어졌다.

1968년 퀴논항 시절

1968년 퀴논항 하역 현장

1969년 월맹군의 기습공격으로 파괴된 수송트럭을 바라보며.

미국 국방부에 걸려 있는, 베트남전 당시 물자 수송 중 전투를 묘사한 그림.

조중훈은 베트남 현지 직원의 복지에 만전을 기했다.

1969년 한진 베트남지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1969년 파월 맹호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1970년 구엔 반 티우 베트남 대통령과 함께.

베트남 군수물자 수송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인력을 수송하기 위해 90인승 중형항공기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를 운항했다.

1969년 3월 대한항공공사 인수 당시 선서하는 조중훈.

1969년 대한항공공사 인수 당시. 불안에 휩싸인 직원들에게 조중훈은 공개석상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감원은 절대 없음을 강조했다.

1973년 이륙하는 B747-200

1969년 일본항공 사장과. 일본과의 항공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낸 조중훈의 다음 목표는 일본 승객을 태우고 서울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1972년 4월 19일 대한항공 KE002 B707 여객기가 LA에 도착한 순간 이를 지켜본 수천 명의 교포가 일제히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1972년 대한항공 KE002 여객기 태평양 횡단 취항식.

1970년 B747 점보기 도입 가계약 서명. 당시 보잉기의 도입은 사업 도약을 위한 과감한 시도였다.

1973년 5월 B747 태평양노선 취항

1971년 전자계산실 발족. 조중훈은 항공공사 인수 직후부터 업무전산화에 관심을 가졌다.

1979년 3월 뉴욕에 취항하면서 오일쇼크의 먹구름을 뚫고 비상했다.

1980년 B747 화물전용기 인수

1983년 5월 중국민항기가 불시착한 천천 미군기지 비행장

1983년 5월 중국민항 총국장과. 이는 훗날 수교 전 중국과의 정기노선을 개설하는 초석이 되었다.

1995년 서울-베이징 노선 취항 기념

1978년 500MD 시범. 생산대수가 1980년 초 200대를 넘어섰다.

1982년 90월 제공호 출고식

해운왕을 꿈꾸던 청년은 장년이 되어서야 바다로 돌아왔다.

한진뉴욕호. 해운은 소년 때부터 품은 꿈이다.

1972년 인왕호 진수식

1972년 인왕호 진수식. 인왕호는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선이다.

1991년 한진해운 롱비치 터미널. 컨테이너가 해운산업 발전의 기초가 될 것임을 예측한 투자였다.

1987년 한진사바나호 진수식

1979년 서울호 엔진룸

1979년 서울호 취항식. 조중훈은 항공사 경영기법을 해운사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1983년 제주 풀 컨테이너선

1990년 한부호 진수식

1986년 한진오슬로호에서. 해운의 경영을 일정기간 대한항공에 위탁하는 방법을 제시한 조양호 당시 수석부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진해운 개혁 과정에서 미주지역 영업 개혁을 주도한 조수호 당시 한진해운 부사장(맨 오른쪽) 등과 함께.

국내 최초의 차량용 LPG충전소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 현장. 조중훈은 해외에서 건설과 토목의 기반을 다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로자를 격려하고 있다.

1976년 사우디 왕자와 환담

1986년 고장력강으로 건조하는 한진뉴욕호 시찰

1995년 한진오사카호 건조 현장

1982년 제동목장 비행활주로 공사

1985년 IMF/IBRD 대표 제동목장 초청 만찬

1981년 제동목장에서. 조중훈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주말이면 가족과 제동목장을 찾으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1972년 다나카 일본 수상과. 조중훈의 민간외교로 우리 정부는 적시적소에 일본 정부로부터 협력기금 차관을 들여오는데 성공한다.

1985년 오사노 겐지 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1973년 한불경제협력회의. 조중훈은 20년 동안 위원장을 맡았다

198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조중훈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민간 외교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1981년 9월 바덴바덴 올림픽회의. 정주영 회장 등과 올림픽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1983년 중국민항 총국장과. 한국과 중국의 하늘길을 잇고자 하는 조중훈의 노력은 1994년에 그 결실을 맺었다.

1993년 중국 국가부주석과 환담

1991년 오치르바트 몽골 대통령과 환담

1981년 인하학원 이사장 취임 10주년.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그의 신조와 학업에 대한 열정의 산출물이다.

1981년 인하대 교정 해시계 제막

1979년 항공운항과 특강. 1976년 세계적인 안전관리능력과 서비스 마인드를 갖춘 승무원을 양성하기 위해 항공운항과를 신설했다.

1996년 인하대병원 개원식. 인하대병원은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가 컸다.

1979년 취임식을 마친 후 인하대 교정에 기념식수 하는 조중훈 이사장

1979년 항공대 이사장 취임식. 항공대를 중심으로 항공공고, 항공전문대, 항공대학원을 설립하고 대한항공 기술연구소를 옮겨와 항공교육과 산학협력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것이 조중훈의 청사진이었다.

1992년 2월 조종학생 1기 수료식에서 수료증을 전달하고 있다.

1996년 제주비행훈련원에서 원생들을 격려하고 있다.

1992년 한진산업대학 졸업식. 시공을 초월한 교육가 조중훈이 길러낸 인재들은 한진과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기량을 뽐내고 있다.

1995년 해양대 명예 공학박사 학위수여식

1988년 정석장학금 수여식

1970년 정원에서. 조중훈은 앞을 내다보고 신중을 기한 '사업의 조각가'였다.

1993년 깐느에서

198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1986년 미얀마 유적지 파간에서. 조중훈은 생각하게 만드는 멘토였다.

조중훈은 사업가로서 동물적 감각이 있었다.

1979년 제동목장에서 장남과 함께

국제포스터박람회 참석. 맨 왼쪽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

1986년 제동목장 저수지에서. 조중훈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사려깊은 경영인이었다.

1969년 한진그룹 연수회 줄다리기. 직원들과 부대끼며 지내길 좋아했다.

1980년 손자의 자전거 안장을 낮춰주고 있다.

1969년 부암장에서 차남과 함께

조중훈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마음의 소통을 중시했고, 이는 그의 경영 과정 속에 항상 묻어났다.

1960년대 산정호수에서 아내와 함께 한 조중훈

월정사 불사에 큰 공헌을 한 조중훈 공덕비가 경내에 서 있다. 탄허 스님이 비문을 썼다.

1983년 불국사 범종 타종식